그깟 공놀이, 그러나 인생이 담긴 공놀이
1.
아침에 눈을 뜨고 순간 눈이 캄캄하였다.
열 살 나는 다시 어제저녁으로 시계를 돌려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숙제를 아차 한 것이다. 어제 분명히 하려고 마음먹었던 숙제. 눈을 뜨고 등교까지는 20여 분 남았다. 부리나케 숙제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엄마는 째려보고 내 뒤통수를 향해 레이저를 쏘아내신다. 식은땀이 나, 그리고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밥도 먹어야 하고 책가방도 싸야 하고, 학교까지 가려면 30여 분을 걸어가야 하는데 암담하다.
다행히 내 기억은 거기서 끝이다.
결말을 이미 30년, 40여 년 가까이 되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그렇게 숙제를 못해서 쩔쩔매던 바로 전날, 그날 내가 무엇을 한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바로 야구, 가을야구를 봤다.
TV를 통해서 저녁 시간 야구 중계를 흥미진진하게 봤다. 빨간색 옷을 입은 팀이 던지고, 치고 달리는 모든 것을 잘하였다. 그 야구 중계에서 나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끝까지 시청하였다. 손에 땀을 쥐면서. 당연히 그 야구 중계 결과는 내가 응원하는 빨간색 옷을 입은 야구팀의 승리다.
승리에 취해서, 그 기쁨에 아직 열 살도 안 된 나는 일찍 잠에 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당시 일상적 멘트에 충실하기에. 야구에 빠져, 그리고 내가 응원하는 빨간색 팀이 이겨 더 숙제라는 꼭 해야 하는 것을 잊고 잠들어버린 것이다.
그날,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기억들.
야구 승리 기쁨과 숙제를 못해서 쩔쩔매고 후회하던 기억들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야구와 숙제. 열 살 경첩의사, 경첩 어린이 추억이다.
어린이, 경첩 어린이는 그날도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열심히, 그리고 신나게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신나게!
생생한 그 추억들로 나는 지금도 야구를 즐기기 위해서는 그 전날, 야구 시작 이전에 미리 할 것들을 하려고 한다. 아찔한 기억이 다행히 좋은 쪽으로 승화되어, 미리 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잡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야구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빨간색 옷 팀은 타 기업으로 인수되었지만 여전히 나의 최애 팀이라는 것.
간혹 누군가 왜? 지역 연고도 없는데 그 팀을 응원하는냐는 질문에 나는 답한다. 그 당시 숙제, 그리고 티브이에서 본 강렬한 기억, 승리 기쁨에서.
2.
가을야구 시즌이다.
올해는 빨간색, 파란색을 메인 유니폼 색깔을 가진 두 팀이 마지막 가을 야구 주인공이다. 아직 최종 결과는 미정이지만, 최종 7차전에서 끝이 날지 그 이전에 트로피 주인공이 가려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깟 공놀이일지 모르지만, 선수들 그리고 그것을 직관, TV, 핸드폰으로 보는 모든 사람들이 공 하나하나에 따라 온몸을 흔들고 비명과 탄성을 지른다. 결국 승패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고 기쁨, 슬픔 둘 중 하나로 결정되겠지만, 사람들 그리고 나도 그 과정에서 인생의 희열도 함께 느낀다.
달라진 것은 선수들만 바뀌었다. 내가 어린 시절, 숙제를 깜박하고 빠져들었던 야구. 당시 선수들은 이제 코치, 감독을 하고 시구, 시타를 한다. 세월이 그렇게 변하였다. 그러나 선수만 바뀌었지, 야구공 하나에 웃고 웃는 나와 다른 야구팬들은 모두 같다. 그 당시는 일부 남성, 어린이 등에 국한된 팬이라면 이제는 남녀노소, 젊은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야구가 되었다. 또한 심판 손, 판단 하나로 볼, 스트라이크 판정에서 이제는 기계가 자동으로 스트라이크 판정을 해준다. 판정에 대한 공정함을 추구하고 뒷말과 깔끔한 경기 진행을 위함이다. 선수들 체격이나 능력이 오래전 보다 더 강해지고 나아진 듯하다. 아울러 체계적인 선수 관리로 각각 능력에 따른 역할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다. 가끔 내가 느끼는 아쉬움은 그 시절보다 선수들이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 아닐까 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응원하는 팀, 그리고 언제나 9회 말 2아웃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
3.
야구는 공정하다.
그렇기에 기본이 중요한 게임이다.
던지고 치고 달리는 기본적인 운동이다. 모두에게 모든 선수에게 공평하게 세 번 스트라이크 기회를 갖는다. 바로 스트라이크존에 딱 세 번 좋은 공이 들어올 때까지 치면 된다. 누군가에게는 다섯 번, 또 다른 사람에게는 두 번 기회는 아니다. 모두 세 번 기회다. 그 세 번의 좋은 공 중에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상황에서 치면 된다. 간혹 선수들 인터뷰에서 공이 수박같이 크게 보인고 쉽게 잘 쳐진다고 말한다. 이는 그 선수가 그만큼 실력, 노력이 따라서 그리 된 것이 분명하다.
치는 것 또한 내가 치는 모든 공이 안타, 홈런이 될 필요도 없다. 때로는 아쉽게 정말 좋은 수비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열 번 쳐서 세 번, 즉 3할 타율만 되더라도 나는 훌륭한 타자가 되고 그렇게 수년을 꾸준히 하면 FA가 되어 충분한 경제적 보상도 따른다. 프로 선수이기에 당연히 능력에 따른 보상, 그리고 결과로서 팬들에게 보답하면 된다.
나는 야구를 즐긴다.
오래전엔, 나도 어린 시절에는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면, 역전패를 당하거나 가을야구 문턱에도 전혀 나가지 못한다면 슬퍼했고 공허한 마음이었다. 괜스레 다른 팀을 응원하는 선수가 미워지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니다. 그 순간을 즐긴다. 야구 결과도 물론 중요하지만, 순간순간 최선 다하는 선수들 모습을 보며 느끼고 즐긴다. 결과는 덤이라고 생각한다. 꾸준히 준비, 단 한 명의 선수가 아닌 각자 역할들이 모여진다면 결과로 이어진다. 그 과정을 즐긴다. 누군가가 그 마지막 영광을 차지할지는 기본, 원칙에 충실한 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깟 공놀이, 그러나 인생이 담긴 공놀이다.
2024년 가을, 열 살 경첩 어린이는 자라서, 경첩의사가 되어 가을 야구를 즐기고 있다. 가을 야구, 한국시리즈를 한 열다섯 경기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또 내년에도 야구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