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콘텐츠를 찾아야지
사실상 기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콘텐츠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
프로젝트의 시작과 동시에 모든 기획자들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그 와중에 꽤 괜찮은! 콘텐츠를 발굴하기 위해 드높은 자료의 산을 무자비하게 파헤치며 콘텐츠의 광맥을 찾는다. 점점이 흩어져 각기 상관없어 보였던 것들이 이 광맥을 찾아냄으로 서로 간에 의미 있는 연결성을 가지고 구조화되기 때문에 기획자는 이때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섬세하게 안테나를 세우며 콘텐츠를 캐고, 캐고, 또 캐낸다.
이 과정은 전체 프로젝트의 첫 단추를 꿰는 일이기에 중요한 단계지만 스스로 어느 정도 조사 기준을 세워놓지 않으면 콘텐츠 찾기의 쳇바퀴에 갇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무한정 조사 범위만 확장시키는 실수를 하기 쉽다.
오래전 해양과학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였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해양 환경의 위험성'에 대해 내용을 정리해 보라 했더니 '해안가 물놀이의 안전'에 대한 내용을 가져왔다. 그 친구는 '해양'과 '과학'이라는 프로젝트의 뿌리가 되는 키워드는 잊어버리고 의식의 흐름이 이끄는 대로 '해양-바다->물놀이', '위험->안전'이라는 키워드의 확장을 생각한 것이다. 기획적 사고가 없으면 충분히 할만한 실수다.
약간의 훈련이 있었더라면, '해양-환경-위험 -> 기후변화-엘리뇨-태풍-홍수-재난'으로 확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여기에 약간의 호기심이 덧붙여진다면, 해양 재난에 대한 최신 뉴스, 학자들의 의견, 기후 재난 예방을 위한 여러 단체들의 노력 등을 좀 더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여기서 전시 흐름(스토리)을 위한 기획적 사고가 한 단계 더 나아간다면 일반 사람들이 해양과 기후재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 조사를 해볼 수 있다.
이처럼 콘텐츠의 맥은 기획자가 어떤 사고를 가지고 캐내느냐에 따라 최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모두를 인도할 수도 있다. 기획자가 내준 길을 따라 열심히 산을 오르던 디자이너, 피디, 각 분야 엔지니어들은 '이 산이 아닌가벼~!' 소리를 듣는 순간 기획자를 그 자리에서 묻어버릴 수도 있다. 이 압박감과 반복되는 콘텐츠 발굴 작업은 기획자를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기획자는 자기 확신을 구축하며 콘텐츠들을 서로 엮어내고, 이것은 곧 프로젝트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 골격이 되어 세부적인 모든 내용들을 컨트롤하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논리적 구조 만들기, 즉 기획이라 한다.
그렇기에 콘텐츠는 기획의 처음과 끝이며 기획자는 콘텐츠의 노예이자 연금술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소 지난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작업에서도 즐거움은 있다.
기획자는 콘텐츠를 찾기 위해 책, 논문, 영화, 광고, 인터뷰, 기타 등등 가능한 모든 곳의 자료에 빠르게 접근하게 되는데 한창 예민해진 기획자의 오감에 걸려드는 온갖 정보들은 때로 놀랍고, 때로 신기하며, 때로 마음을 울린다. 어린아이가 처음 세상을 배울 때처럼, 순수한 지식의 즐거움을 느낄 때가 이때인 것이다.
하나의 세계란 얼마나 넓고 깊은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느낀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전혀 몰랐을, 어느 세계의 문을 열었을 때 느끼는 두려움과 기쁨을 기획자는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의 콘텐츠를 캐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줄기를 끌어올림으로써 밭 전체를 수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기획자는 뒤를 돌아보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 우리 프로젝트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컨셉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