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공간과 매체사이
전시에서 컨셉만큼 많이 회자되는 단어는 단연코 '스토리'라 할 수 있다.
'스토리는 어떻게 구성하실꺼죠?' 라든가, '스토리가 이게 말이 돼?' 라든가, '스토리가 위계가 안 맞다' 라든가.... 온갖 사람들이 스토리를 가지고 난리다.
그럼 대체 스토리가 뭐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스토리가 '행동의 구조'라고 했는데 이 말은 전시에서 만큼은 명확한 참말이다.
초창기 전시는 신기한 것들의 집합체, 사람들이 구경할만한 것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전시의 주체가 되는 사람(관람객)', 그리고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공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하면 관람객에게 더 잘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갔다. 스토리는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공간 기반의 주제 전달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전시의 스토리에는 이 행동의 구조화 즉, '관람객을 의도화된 공간으로 유도하여 예측가능한 행동을 만들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어린 시절 단체 방문하던 박물관을 떠올려 보자. 들어가는 입구에는 언제나 큰 연표가 벽면에 붙어 있고, 진열장-설명패널, 진열장-설명패널의 나열인 와중에 가끔 미니어처 모형이나 지형을 표현한 대형 부조가 등장해 분위기를 환기시키곤 했다. 당시의 박물관은 교육 공간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그에 맞게 깊이 있는 다량의 정보를 잘 정리하여 전시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박물관은 사정이 다르다. 정보는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며 사람들은 원하는 게 있으면 손가락만 간단히 움직이면 된다. 이런 세상에서 단순히 교육적 정보 전달 공간이라는 것은 그 존재 의미가 희석될 수 있다.
그렇기에 스토리는 늘 화두일 수밖에 없다.
관람객들이 반드시 물리적인 공간을 방문해야만 느낄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공간 경험'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분위기 좋은 카페를 방문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느끼는 압도감,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느끼는 경외감처럼 반드시 그 공간에서만 경험이 가능하고 그 경험으로 느껴지는 어떤 감정까지 포함한다.
여러 매체를 활용하여 공간을 디자인하는 이 '연출'은 관람객의 구체적인 경험과 스토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컵을 전시한다고 해보자. 이 컵을 놓을 공간을 네모나게 만들 것이냐, 동그랗게 만들 것이냐, 진열장 안에 진품을 놓을 거냐, 모형으로 엄청나게 큰 컵을 만들어 놓을 것이냐, 영상을 컵과 함께 놓는다면 컵을 만드는 영상을 놓을 것이냐, 컵에 담긴 커피가 보이는 영상을 놓을 것이냐, 그렇다면 모니터를 쓸 거냐, LED를 쓸 거냐... 선택을 위한 논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는데 결국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이 복잡한 논의들은 하나의 기준으로 모이거나 걸러지고 그 디테일이 결정된다.
이와 같이 스토리는 기획 의도를 뿌리 삼아 공간과 매체를 하나의 언어로 엮어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