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애틱 Sep 30. 2021

불협화음 가족

행복한 슈퍼보드


하고 싶지만 포기해야 할 것을 분별하는 연륜이 생겼다. 말하자면 자기 객관화를 통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윤곽이 잡혔다는 뜻이다. 인간의 무한 가능성과 대기만성 숭고한 노력을 외면하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불혹이 넘은 내가 달그락거리는 뼈마디를 이끌고 아이돌 가수가 될 거라는 허무맹랑한 소리 안 하는 분별력이 생겼다고 보는 게 맞겠다.


태생적 결핍으로 포기해야 마땅하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삶을 고되고 힘들게 한다. 어처구니없는 하찮음에 박장대소가 터지더라도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간 쌓은 연륜을 보란 듯 거스르는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화음에 대한 집착과 집념이다.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 학식을 곁들인 일가견은 다음 생을 기약하고 대중가요 이하 로큰롤, 헤비메탈, 컨트리, 시티팝, 재즈, 오페라, 행진곡, 클래식, 뉴에이지 장르 불문 무작정 듣는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의 마음이 큰데, 여러 악기가 딱 맞게 어우러져 감미롭고 때론 심장을 뛰게 하며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대서사시에 경탄하게 된다.


내 눈엔 콩나물 대가리가 걸린 너저분한 빨랫줄 이상 이하도 아닌 것들이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베이스, 오보에, , 하프, 트롬본 위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살아 움직이는 건 마법과 같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아티스트가 뚝딱뚝딱 악보를 그리고, 그걸 받은 하우스 밴드가 드럼과 베이스 기타로 만드는 리듬 위로 멜로디를 쌓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모습은 로켓을 화성로 쏘아 보내는 과학 이상의 경이로움이다.


클래식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 성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미묘한 음정과 박자의 차이를 짚어내며 절망에 빠지고 감탄하는 모습이 나온다. 허세에 찬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희화화될 때도 있지만, 나는 어렴풋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것도 같다. 듣는 귀는 어느 정도 예민하기 때문이라며 아내가 들으면 배꼽 잡을 소리를 한다.

그런데 여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슴으로 느낀 음악의 감동을 목소리 재연하면 어째서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솔을 솔이라 부르는데 왜 엉뚱한 소리가 나오느냔 말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지 못한 안타까움을 우리 아내는 모른다. 악보에 까막눈인 슬픔을 알 리가 없다. 피아노 학원에 가면 선생님이 틀린 손가락을 자로 때린다는 공포감이, 눈물로 읍소하며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싫다고 떼를 썼던 이유였다. 태생적 결핍이 후천적 퇴화로 이어지는 탄식의 순간이다.


그런데 아내도 비슷한 아픔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한번 꽂힌 노래를 온종일 흥얼거리 아내의 노랫가락을 내가 거들 때 확연히 드러난다. 아내의 멜로디에 '화음'을 얹는 즉시 갈 길을 잃은 음정이 내 소리와 뒤엉켜 덩어리 소음이 되어 버리고 만다. "왜 그러냐구우~ 방해 좀 하지 말라구~" 라고 떼를 쓰고 다시 시작하지만, 이미 집 나간 음정은 마이웨이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럼 내가 원래 노래 부를 테니까 자기가 화음 좀 얹어 줘."라는 제안에, 아내가 '화음'을 얹어 보지만 어차피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이런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섯 살 딸은 다시 스케치북에 얼굴을 묻고 제 할 일을 한다. 이미 익숙해진 모습이다. 딸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절대음감의 귀를 선물해 주진 못할지언정, 정서 함양에 도움 되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그나마 위화감이 덜 느껴지는 이유는 딸의 노래 실력 역시 소름 끼치게 좋은 편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딸이 부르는 동요 대부분이나 만화 주제곡은 항상 플랫으로 주저앉는 걸 보니 말이다. 가끔 래퍼로도 변신하는데  '어! 어!'로 시작해 정박으로 딱딱 떨어지는 걸로 보아, 힙합 영재를 딸로 둔 부모로 인터뷰에 나와 무슨 말을 할지 고민은 안 해도 되니 안심이다.


우리가 어릴 적 즐겨보던 '날아라 슈퍼보드'에 한창 빠져 있는 딸이 주제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치키치키 차카차카'로 시작하는 정겨운 가락이었다. 한껏 흥이 오른 우리 부부는 치키치키에서부터 화음을 쌓으며 합창을 시작했다. 딸도 질세라 목청을 가다듬는다. 오늘도 우리는 (불협) 화음을 쌓는다.


그래도 내 귀에는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노래가 없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덧붙여야겠다. 우리는 노래방을 즐겨서 갔고, 노래를 못 한다는 말을 들은 바 없다. 심지어 우리 결혼 축가는 내가 직접 불렀다. 반주를 프로듀싱 수준(?)에 가깝게 의뢰 녹음까지 하면서 말이다. 뒷이야기가 있지만 어쨌든 축가를 직접 불렀다는 게 중요하다.


노래 중 창문을 힐끗거리며 단단히 닫혀 있나 확인했다. 옆집 사는 말레이시아 가족이 한국에는 이상한 노래가 있다고 오해할까 걱정이 돼서 그런 게 아니다. 아내와 딸이 벌레를 워낙 싫어하니까 걱정됐을 뿐이다. 혹시 모르니까 커튼도 꼭 쳐야겠다. 우리 집에서 들리는 소리로 오해하면 안 되니까 말이다.




<Photo by Caleb George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오버 더 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