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 게야 소라야
말레이시아 해변은 어릴 때 추억의 한 자락과 닮았다. 모래사장 뒤 듬성듬성하게 꽂힌 나무의 그늘에는 어김없이 돗자리와 텐트가 펼쳐졌다. 꼬맹이들은 바닷가를 강동거리며 뛰어다니기 바쁘다. 취사 제한은 없는지, 집집이 식사를 준비하는 아빠들은 작은 화로에 불을 피우고 미리 준비한 양념 닭을 익히고 있다. 하늘 위로 연기가 풀풀 피어난다. 인심 좋은 현지인은 맛이나 보라며 먹음직하게 그을음 묻은 닭다리와 허벅지를 접시 가득 나눠주기도 한다. 반면 술판이 벌어진 모습이나 삼겹살 굽는 냄새는 상상할 수 없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덕분이다. 대신 외국인이 수건으로 꽁꽁 싸맨 맥주 캔 정도는 애교로 눈감아 주는 것 같다.
휴가를 낸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부풀었다. 주로 '뭘 먹으면 맛있지?'로 귀결하는 흥분 섞인 대화가 오갔다. 아내와 난 노릇하게 구운 가래떡에 얼음 맥주를 꿈꿨고, 딸은 야외에서 끓여 먹는 짜파게티를 그리며 각자의 장바구니를 채워나갔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딸은 꿀벌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한껏 신남을 방출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주물럭거린 과자봉지를 마침내 가방에 챙겨 넣었다. 고사리손으로 집었다 놨기를 반복하며 꼭 소풍 가서 먹겠다고 아끼던 병아리색 포장의 크래커였다.
고속도로를 삼십분 달려 도심을 벗어났다. 능선을 따라 심어놓은 팜 나무는 하늘 턱까지 올라 차 지평선 너머로 이어졌다. 광활한 농지였다. 땅끝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다. 우리의 마음마저 트이고 있었다.
도로 위 쥐포처럼 납작해진 왕도마뱀의 흔적, 세월을 못 견디고 낡아 으스러진 목재 집, 녹슨 뼈대가 앙상히 드러난 폐공장, 닭들이 그득한 닭장을 옆에 두고 닭요리를 파는 도로 옆 식당을 지나 드디어 도착한 곳은 모립 비치였다.
주중이라 한적했다. 운 좋게 그늘막이 있는 평상을 찾았다. 뒤로는 한때 호텔이었으리라 짐작되는 건물이 앙상한 벽돌만 남긴 채 고즈넉하게 있었다. 사라져버린 지붕의 바닥은 나무가 빽빽하게 메꿔 널따랗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다. 마치, 영화 '툼 레이더' 배경인 앙코르 와트의 타프롬 사원을 연상시킨다, 고 하면 당치도 않는 소리라고 핀잔을 받을 수 있으니 조용히 하기로 하자. 이파리 사이사이로 새끼 원숭이가 드문드문 보이는 걸로 보아 옹기종기 원숭이 가족이 터를 잡은 것 같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아내와 딸의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흩날리는 끊임없는 바람이다. 후끈한 더위를 느낄 새가 없다. 갯벌이 드러나는 물때까지 다섯 시간 여유가 있었다.
인기척만 들려도 총알처럼 사라지는 저놈의 물고기를 찾는 것도 가뜩한데 잡아내기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둘 불어났다. 어깨에 짓누르는 가장의 무게란 이런 것일까. 잠자리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휘두르는 품새가 사뭇 비장해진다. 그러던 와중 눈먼 물고기 몇 놈이 잠자리채 안에 들어왔다.
- 까짓거! 이것 봐! 아빠가 금방 잡았지? 거봐, 딸~ 아빠가 금방 잡아 준다니까~
세상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호기롭게 말했다.
양동이에 담은 망둥이를 관찰하느라 눈이 동그래진 딸을 두고, 아내와 나는 바위에 붙은 소라를 찾으러 다녔다. 횟집 크기는 아니더라도 제법 토실해 보였다. 아내가 자꾸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바위를 샅샅이 훑어내리는 모습이 눈에서 불을 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질세라 나도 레이저 스캔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 누군가가 우리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뛰어 올라갔다. 느낌이 싸하더니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자리를 비운 동안 원숭이 떼가 쓸고 갔다. 지퍼로 꼭꼭 닫아둔 음식 가방을 다 헤집어 놓은 것이다. 애초부터 원숭이 가족이 신경 쓰였지만, 이토록 대담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온다 해도 가방 지퍼까지는 못 열겠지, 원숭이 지능을 과소평가했던 불찰이 대참사를 불러왔다. 그늘막 지붕에 자리 잡은 원숭이 놈은 우리가 구워 먹기로 한 가래떡을 맛있게도 뜯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오물거리는 입을 보니 천국의 맛을 보는 중이 틀림없다.
하늘에서 불쑥 부스러기가 우수수 내려왔다. 화들짝 놀라 위를 올려 봤다. 나뭇가지에 이미 자리 잡은 또 다른 원숭이 놈의 손에 과자 봉지가 들려 있다. 왠지 익숙한 색깔이다. 아, 탄식이 흘렀다. 딸이 일주일 넘도록 주물럭거린 그 과자 봉지다. 잠시 후 병아리색 과자 껍데기가 벚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아앙~ 내가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이이잉~ "
딸의 눈에 슬픔이 가득 고인다. 곧 쌍심지를 화르르 켜더니 말을 이었다.
"아빠!! 원숭이 너무 얄미워!! 나중에 꼬리 잡고 뱅글뱅글 돌려서 상어가 득실거리는 바다에 휙 하고 던져줘, 알겠지??"
"으응… 그래, 까짓거 그 과자 아빠가 다섯 개 사줄게. 슬퍼하지 마."
"두고 보자 원숭이. 원수를 갚아주겠다!!"
딸은 고사리손으로 주먹을 말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옆을 지키던 아내 역시 나름의 이유로 주먹을 꽉 쥐더니 부르르 떨고 있었다.
"우리 가래떡을 다 먹다니…. 원숭이 저놈…. 용서하지 않겠다…."
노을 지는 갯벌은 아름다웠다. 주황색으로 시작해 보라색과 남색으로 천천히 변하는 팔레트 같다. 멀리서는 말레이시아 꼬맹이가 노는 소리가 들렸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꽤 정확한 발음이 울려 퍼졌다.
바닷물이 잔뜩 빠지자 갯벌에 웅덩이가 생겼다. 손전등으로 물속을 휘휘 훑었다. 휙! 납작하게 생긴 게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름 모를 들꽃도 학명이 있고 이름도 있을 테지만, 무식함은 낭만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망둥이에 이은 그 게의 이름은 생김새를 본떠 '뾰족 게'라 부르기로 했다.
망둥이로 단련된 스피드로 뾰족 게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한편 둥그런 몸뚱어리를 가진 놀란 표정의 게는 '놀란 게'라 이름 붙였다. 두 개의 양동이를 준비해 종류에 따라 소라류는 이쪽, 게류는 저쪽으로 나누어 담았다.
"어머, 게들이 지금 싸우나 봐, 어떡해~"
뾰족 게와 놀란 게가 좁은 양동이에 갇혀 신경이 날카로워졌는지 영역 다툼을 벌이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뾰족 게가 덩치에서 확연히 우세였다.
"헉!! 놀란 게 집게발이 떨어졌어!"
놀란 것도 잠시,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싸우는 게 아니라, 먹이사슬에 따른 살육의 현장이었다. 뾰족 게가 놀란 게의 몸통을 반으로 찢어발겨 버렸다. 생명이 사그라져 식어버린 몸은 반 토막 났고, 연이어 내장이 흘러내렸다. 뾰족 게는 기다렸다는 듯 연주황빛 내장을 후루룩 집어삼킨다. 으악! 소리가 나는 참혹함이다. 간장게장 등딱지에 밥 비벼 먹는 내 모습이 겹쳐 보였으나 일단 모르겠고, 저 게 놈의 카니발리즘은 처참하고 잔인했다. 동영상을 찍던 아내는 어디까지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정겨워 보이는 말레이시아 커플이 홀연히 나타나 주먹 크기만 한 뾰족 게를 시크하게 건네줬다. 우리 가족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먼발치서 보고 친절을 베푼 것 같았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대한 뾰족 게의 등장으로 장내가 순식간에 정리됐다. 식겁하고 모래 속으로 몸을 숨기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안녕, 얘들아. 즐거웠어. 너도 잘 가."
갯벌에 놓인 소라를 바라보던 아내의 탄식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