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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애틱 Oct 04. 2021

개미 대학살

어이쿠, 세상에



누군가 이미 친절하게 뚫어놓은 구멍, 어두운 환경과 적당한 습도, 풍부한 먹잇감의 발견, 심지어 천적으로부터 피신하기에 완벽한 장소가 밥솥 내부일 거라고 여왕개미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후손을 대대손손 번식시킬 장소로 밥솥을 선택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겠지만, 미리 알았길 후회하는 시간조차 허락되었는지 의문스럽다. 뜨거운 증기에 개미알이 익어가고, 자손들은 물론 본인마저 스팀에 삶아질 절체절명에 처했을 때는 퇴로를 찾기에 이미 늦은 때였을 것이다.






2007년 즈음의 서울 마포구 대흥동 뒷골목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사는 장소가 바뀌어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다.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학생이었고, 혼자 사는 게 더 익숙해진 자취생 시절이었다.


생명과 자연은 늘 호기심을 자극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라는 3부작 장편소설과 이후 출판한 '개미 혁명'을 밤새워 읽었고, 개미의 높은 사회성지능에 감탄하며 생물학자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 후 동일 작가의 여러 작품 속에 등장하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백과사전'을 통해 개미의 기억을 떠올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생명과학을 전공으로 한 대학 시절은 원룸에서 밥을 먹을 때보다 학교 식당에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쌀을 불려 뜸 들인 밥솥 밥보단 전자레인지 전자기파를 담은 플라스틱 즉석밥을 선호하던 때였다.

이런 이유로 엄마가 사주신 분리형 커버 6인용 쿠쿠 전기압력밥솥은 누렇게 변색한 굳은 밥 보관용 통 또는 코드 뽑힌 자취방 소품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자취생을 둔 엄마는 내가 집에 들를 때마다 여러 반찬을 아이스박스에 담아 두느라 바쁘셨다. 틈없는 완벽한 테트리스였다. 한 숟갈이라도 집에서 밥을 먹었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이었을거다. 그나마 여러 차례 회유와 내 성향에 익숙해지셨기에 쉽게 상하는 반찬보다는 얼렸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로 만들어 주셨다. 원룸의 냉동고는 늘 한두 끼로 나뉘어 꽁꽁 얼린 육개장, 양념 돼지고기, 갈비탕, 김치찌개 등으로 그득했다.


그날은 유난히 요리학원을 운영하셨던 엄마의 음식 그리웠다. 꽁꽁  음식도 빛을 볼 때라 생각것 같다. 그리움을 달랠 요량으로 양념 돼지고기를 녹이고, 간단한 밑반찬을 준비했다. 오랜만에 쌀을 씻고 불려두었다. 간만에 실력을 발휘하게 된 전기밥솥은 신난 목소리로 "취사가 준비되었습니다"라고 알려줄 기세였다. 물론 그때는 음성지원이 되 밥솥이 나오기 전이다.


'췩.췩.췩.췩'

압력추가 증기 기관차 소리를 내며 열심히 돌아갔다. 좁은 원룸은 밥 짓는 냄새로 가득했다. 도마 위 똑딱똑딱 칼질하는 엄마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적당히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해동이 끝난 양념 돼지고기를 얹었다.

'취이이이~' 하고 익는 소리가 매콤하고 달짝지근한 냄새를 타고 흘렀다.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더니 엄마가 해주시던 맛 그대로였다. 여기에 갓 지어 윤기 흐르는 쌀밥을 곁들일 생각을 하니 과식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준비가 끝났으니 밥솥 증기만 빠지면 즉시 맛난 한 끼를 시작할 참이다. 벌써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밥솥의 스팀캡이 증기를 뿜어냈다.


"푸수슈슈슈슉, 슉슉. 파바박!!"

"이게 뭐야!!??"


증기와 함께 까만 가루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방바닥엔 활화산의 화산재 같은 가루가 퍼져나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흘러야 할 증기 배출 소리와는 결이 다른 푸슈슈슉, 팍팍이 섞인 분절음이 이어졌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산재에 혼비백산 피신을 한 뒤, 정체불명의 가루를 털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까만 것들이 뭔지 관찰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은 직후였다. 1mm 남짓 크기의 까만 가루라 생각했던 것은 개미의 사체였다.




에필로그.


그날 식사를 어찌했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다. 충격에 의한 상실인지 세월에 따른 망각인지 모르겠다. 다만 비위가 나쁘지 않고 좀처럼 음식을 남기지 않는 습관을 투영해 보면, 지어진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고 이상 없음을 확인한 뒤 맛있게 마치지 않았을까 한다.


세척 작업은 잊지 않았다. 분리 가능한 부품은 싹 다 떼어내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 나오는 콜로니가 그대로 재연되어 있음에 아주 놀랐던 기억이 난다. 여왕개미 이하 개미알, 병정개미, 일꾼개미 등이 개체별로 모조리 익어있는 모습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다. 스팀캡을 통해 분출된 녀석들까지 세면 꽤 세력을 증식한 집단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본의 아니게 한 세대의 종말을 초래한 것에 무척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 때문인지 집 앞마당에서 발견한 개미 땅굴을 헤집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더라도, 절대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딸에게도 개미 땅굴을 삽으로 뒤집지 말라 당부해두었다.

집 앞마당에 터를 잡은 여왕개미는 본인의 현명한 터 잡기 능력을 과시할 때가 아니다. 대한민국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뒷골목에서 증기와 함께 유명을 달리한 여왕개미와 그 후손에게 감사하고 넋을 기려야 함을 알아야 한다.




<Photo by  Emily Campbel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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