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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애틱 Oct 18. 2021

갯벌, 첫인상이 중요해

잘 가, 게야 소라야


연일 삼십도를 웃돌았다. 말레이시아 기온은 시월 셋째 주에도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유례없는 한파가 닥쳤다는 우리나라는 알 바 아니라는 듯, 펄펄 끓는 태양은 말레이시아를 펄펄 끓일 기세다.

한편, 여섯살짜리 우리 딸은 온라인 수업으로 머리가 펄펄 끓고 있었다.

"으아아~ 온라인만 없으면 세상이 행복할 거야! 온라인이 사라지면 좋겠어!!"

긴 절규가 이윽고 학교에 닿았나 보다. 주일짜리 중간 방학이 응답으로 돌아온 것이다.


기세등등한 코로나도 풀이 꺾이고 방역 등급이 대폭 완화되어 장거리 이동이 가능해졌다는 소식이 때마침 들려왔다. 우리 가족은 집에서 시간 거리 갯벌에서 오랜만에 찾은 자유를 즐기기로 했다.


말레이시아 해변은 어릴 때 추억의 한 자락과 닮았다. 모래사장 뒤 듬성듬성하게 꽂힌 나무의 그늘에는 어김없이 돗자리와 텐트가 펼쳐졌다. 꼬맹이들은 바닷가를 강동거리며 뛰어다니기 바쁘다. 취사 제한은 없는지, 집집이 식사를 준비하는 아빠들은 작은 화로에 불을 피우고 미리 준비한 양념 닭을 익히고 있다. 하늘 위로 연기가 풀풀 피어난다. 인심 좋은 현지인은 맛이나 보라며 먹음직하게 그을음 묻은 닭다리와 허벅지를 접시 가득 나눠주기도 한다. 반면 술판이 벌어진 모습이나 삼겹살 굽는 냄새는 상상할 수 없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덕분이다. 대신 외국인이 수건으로 꽁꽁 싸맨 맥주 캔 정도는 애교로 눈감아 주는 것 같다.


휴가를 낸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부풀었다. 주로 '뭘 먹으면 맛있지?'로 귀결하는 흥분 섞인 대화가 오갔다. 아내와 난 노릇하게 구운 가래떡에 얼음 맥주를 꿈꿨고, 딸은 야외에서 끓여 먹는 짜파게티를 그리며 각자의 장바구니를 채워나갔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딸은 꿀벌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한껏 신남을 방출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주물럭거린 과자봉지를 마침내 가방에 챙겨 넣었다. 고사리손으로 집었다 놨기를 반복하며 꼭 소풍 가서 먹겠다고 아끼던 병아리색 포장의 크래커였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꼼짝을 못 할 때, 앞마당에 돗자리를 깔아준 적이 있었다. "아빠, 바깥에서 과자 먹으니까 꼭 소풍하러 온 것 같아. 너무 신나요!!" 엎어지면 진짜로 코 닿는 집 앞에서도 행복하던 딸이었다. 이번엔 진짜 소풍을 떠나서 아껴둔 과자를 먹게 됐으니 얼마나 즐거울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했다.





고속도로를 삼십분 달려 도심을 벗어났다. 능선을 따라 심어놓은 팜 나무는 하늘 턱까지 올라 차 지평선 너머로 이어졌다. 광활한 농지였다. 땅끝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다. 우리의 마음마저 트이고 있었다.


도로 위 쥐포처럼 납작해진 왕도마뱀의 흔적, 세월을 못 견디고 낡아 으스러진 목재 집, 녹슨 뼈대가 앙상히 드러난 폐공장, 닭들이 그득한 닭장을 옆에 두고 닭요리를 파는 도로 옆 식당을 지나 드디어 도착한 곳은 모립 비치였다.


주중이라 한적했다. 운 좋게 그늘막이 있는 평상을 찾았다. 뒤로는 한때 호텔이었으리라 짐작되는 건물이 앙상한 벽돌만 남긴 채 고즈넉하게 있었다. 사라져버린 지붕의 바닥은 나무가 빽빽하게 메꿔 널따랗고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다. 마치, 영화 '툼 레이더' 배경인 앙코르 와트의 타프롬 사원을 연상시킨다, 고 하면 당치도 않는 소리라고 핀잔을 받을 수 있으니 조용히 하기로 하자. 이파리 사이사이로 새끼 원숭이가 드문드문 보이는 걸로 보아 옹기종기 원숭이 가족이 터를 잡은 것 같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아내와 딸의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흩날리는 끊임없는 바람이다. 후끈한 더위를 느낄 새가 없다. 갯벌이 드러나는 물때까지 다섯 시간 여유가 있었다.


". 그럼 파티를 한번 시작해 볼까~"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서 짜파게티 익는 소리가 보글보글 퍼졌다. 밤새 얼린 맥주도 꺼냈다. 짜장을 잔뜩 묻힌 얼굴로 딸이 웃는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돗자리에 누우니 여기가 천국이다. 떠 있는 구름을 보니 솔솔 낮잠이 밀려왔다.


썰물에 드러난 바위에는 손가락만한 망둥이가 붙어 있었다. 사실 망둥이는 아닌데 닮은 죄로 그냥 망둥이라 부르기로 했다.


- 꺄아~ 아빠 저 물고기 봐, 너무 신기해!

- 오빠, 잡아서 우리 딸 보여주면 너무 신나 하겠다, 근데 너무 빨라서….

- 아빠는 훨씬 더 빠르니까 잡을 수 있을걸? 그치, 아빠아~


인기척만 들려도 총알처럼 사라지는 저놈의 물고기를 찾는 것도 가뜩한데 잡아내기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둘 불어났다. 어깨에 짓누르는 가장의 무게란 이런 것일까. 잠자리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휘두르는 품새가 사뭇 비장해진다. 그러던 와중 눈먼 물고기 몇 놈이 잠자리채 안에 들어왔다.

- 까짓거! 이것 봐! 아빠가 금방 잡았지? 거봐, 딸~ 아빠가 금방 잡아 준다니까~

세상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호기롭게 말했다.


양동이에 담은 망둥이를 관찰하느라 눈이 동그래진 딸을 두고, 아내와 나는 바위에 붙은 소라를 찾으러 다녔다. 횟집 크기는 아니더라도 제법 토실해 보였다. 아내가 자꾸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바위를 샅샅이 훑어내리는 모습이 눈에서 불을 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질세라 나도 레이저 스캔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여기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아이고, 어쩐다."


멀리 누군가가 우리에게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뛰어 올라갔다. 느낌이 싸하더니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보! 어떡해!! 저놈들이 우리 떡 다 가져갔어!!!"


자리를 비운 동안 원숭이 떼가 쓸고 갔다. 지퍼로 꼭꼭 닫아둔 음식 가방을 다 헤집어 놓은 것이다. 애초부터 원숭이 가족이 신경 쓰였지만, 이토록 대담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온다 해도 가방 지퍼까지는 못 열겠지, 원숭이 지능을 과소평가했던 불찰이 대참사를 불러왔다. 그늘막 지붕에 자리 잡은 원숭이 놈은 리가 구워 먹기로 한 가래떡을 맛있게도 뜯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오물거리는 입을 보니 천국의 맛을 보는 중이 틀림없다.



하늘에서 불쑥 부스러기가 우수수 내려왔다. 화들짝 놀라 위를 올려 봤다. 나뭇가지에 이미 자리 잡은 다른 원숭이 놈손에 과자 봉지가 들려 있다. 왠지 익숙한 색깔이다. 아, 탄식이 흘렀다. 딸이 일주일 넘도록 주물럭거린 그 과자 봉지다. 잠시 후 병아리색 과자 껍데기가 벚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아앙~ 내가 먹으려고 가져온 건데. 이이잉~ "

딸의 눈에 슬픔이 가득 고인다. 곧 쌍심지를 화르르 켜더니 말을 이었다.

"아빠!! 원숭이 너무 얄미워!! 나중에 꼬리 잡고 뱅글뱅글 돌려서 상어가 득실거리는 바다에 휙 하고 던져줘, 알겠지??"

"으응… 그래, 까짓거 그 과자 아빠가 다섯 개 사줄게. 슬퍼하지 마." 

"두고 보자 원숭이. 원수를 갚아주겠다!!"



딸은 고사리손으로 주먹을 말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옆을 지키던 아내 역시 나름의 이유로 주먹을 꽉 쥐더니 부르르 떨고 있었다.


"우리 가래떡을 다 먹다니…. 원숭이 저놈…. 용서하지 않겠다…."



노을 지는 갯벌은 아름다웠다. 주황색으로 시작해 보라색과 남색으로 천천히 변하는 팔레트 같다. 멀리서는 말레이시아 꼬맹이가 노는 소리가 들렸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꽤 정확한 발음이 울려 퍼졌다.


바닷물이 잔뜩 빠지자 갯벌에 웅덩이가 생겼다. 손전등으로 물속을 휘휘 훑었다. 휙! 납작하게 생긴 게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름 모를 들꽃도 학명이 있고 이름도 있을 테지만, 무식함은 낭만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망둥이에 이은 그 게의 이름은 생김새를 본떠 '뾰족 게'라 부르기로 했다.


망둥이로 단련된 스피드로 뾰족 게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한편 둥그런 몸뚱어리를 가진 놀란 표정의 게는 '놀란 게'라 이름 붙였다. 두 개의 양동이를 준비해 종류에 따라 소라류는 이쪽, 게류는 저쪽으로 나누어 담았다.

 

"어머, 게들이 지금 싸우나 봐, 어떡해~"

뾰족 게와 놀란 게가 좁은 양동이에 갇혀 신경이 날카로워졌는지 영역 다툼을 벌이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뾰족 게가 덩치에서 확연히 우세였다. 

"헉!! 놀란 게 집게발이 떨어졌어!"

놀란 것도 잠시,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싸우는 게 아니라, 먹이사슬에 따른 살육의 현장이었다. 뾰족 게가 놀란 게의 몸통을 반으로 찢어발겨 버렸다. 생명이 사그라져 식어버린 몸은 반 토막 났고, 연이어 내장 흘러내렸다. 뾰족 게는 다렸다는 듯 연주황빛 내장을 후루룩 집어삼킨다. 으악! 소리가 나는 참혹이다. 간장게장 등딱지에 밥 비벼 먹는 내 모습이 겹쳐 보였으나 일단 모르겠고, 저 게 놈의 카니발리즘은 처참하고 잔인했다. 동영상을 찍던 아내는 어디까지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정겨워 보이는 말레이시아 커플이 홀연히 나타나 주먹 크기만 한 뾰족 게를 시크하게 건네줬다. 우리 가족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먼발치서 보고 친절을 베푼 것 같았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대한 뾰족 게의 등장으로 장내가 순식간에 정리됐다. 식겁하고 모래 속으로 몸을 숨기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심약한 분을 위해 살육 장면은 없음. 살육의 현장 직후 뾰족 게와 놀란 게는 즉시 분리 조치되었다. 9시 방향 작은 놈이 범인.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딸은 양동이에 갇힌 녀석들을 하나씩 놓아주며 일일이 작별 인사를 했다.

"안녕, 얘들아. 즐거웠어. 너도 잘 가."  

갯벌에 놓인 소라를 바라보던 아내의 탄식이 흘렀다.

" 잉….  얘 많이 네."

" 왜, 아쉬워? 그냥 잡아먹을까? "

" 아, 아니…."


"아빠아~ 처음 만난 사이는 친절해야 해. 그러니까 잡아먹으면 안 돼. 알겠지?"


딸은 첫인상이 중요하다며 아까워도 참으라 극구 약속을 받아냈다. 지만 나지막하게 다짐하는 아내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소라는 다음번에 잡아서 쪄 먹어야지….'


집으로 돌아온 딸은 모레 다시 시작할 온라인 수업에 절했다. 자유의 장례식이 벌어졌다고 야단법석이다.


"딴딴따단.. 딴딴따단.."

노래에서 사뭇 진지함이 느껴졌다.

"근데 딸아, 그건 결혼식 음악 아니니?"

"여보, 근데 일맥상통하긴 한다, 그지? 크크크크"


풍경이 예뻤고 노을이 예뻤다. 즐거운 우리 가족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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