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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애틱 Dec 30. 2021

이층 버스와 파티 초대장

일곱 살 내딸기 2512일


1장. 투어냐 파티냐, 딸기야 울지 마라


 놀다 돌아온 딸의 뺨이 발그레했다. 들뜬 모습이었다. 줄리아가 카드를 줬다고 했다. 어느새 베스트 프렌드가 된 줄리아는 앞집 사는 동갑내기 동네 친구이다. 자랑하듯 불쑥 내민 손에는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장이 들려있었다.

'우와! 좋겠다. 아빠도 가고 싶다!!' 호들갑을 떨며 한껏 바람을 잡았다. 녀석의 발그레한 뺨이 더 짙어졌다.


 카드를 읽는 순간 등이 따끔거렸다. 땀샘에서 불쑥 흘러나온 식은땀 때문일 것이다. 등을 벅벅 긁으며 시간을 벌었지만, 한번 깜깜해진 눈앞은 좀처럼 광명을 찾지 못했다. 마술사의 카드 마술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에 빠져 들었다.

 그 이유는 일주일을 고민하다가 딱 삼십 분 전에 예약을 마친 환불금지 쿠알라룸푸르 이층 버스 야간 도시 투어 일정이 그대로 복사되어 카드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핸드폰으로 예약 화면을 다시 열어봤다. 무슨 조화인지 환불금지 글자가 더 커져 있었다.

 정성껏 꾸민 줄리아의 초대장이 원망스러워질 지경이다. 아니, 사실은 며칠을 고민했는데 까짓 거 한 시간 더 주저하지 않은 우리의 추친력(?)을 자책해야 했다.


- 파티에 꼭 가고 싶은데 어떡해, 아빠?

-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 그렇지만 파티에는 처음 초대받은 거란 말이야, 엄마?

- 투어는 취소가 안 된다는데…. 내년에 꼭 파티에 가는 걸로 하자, 어때?

- 내년까지 어떻게 기다려. 으앙~


 파티에 가지 못하게 된 걸 알게 된 녀석은 눈물을 터트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멈추질 않았다. 서러움에 어깨까지 들썩이기 시작했다. 얼굴을 파묻은 쿠션에는 눈을 따라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궁여지책으로 각자도생의 길을 제안했다. 딸은 파티, 엄마·아빠는 투어를 나누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엄마 아빠랑 투어도 하고 싶고, 줄리아 파티에도 가고 싶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선택의 기로에 선 녀석의 울음이 더 커졌다.

 줄리아에게 선물을 줘서 파티에 못 가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자는 말에 들썩임이 조금 잦아들었으나, 이십 분간 멈추지 못한 울음 탓에 두 눈은 이미 퉁퉁 부어버린 후였다.


 이층 버스 시티 투어는 반드시 재미있어야 한다. 반드시. 제발….



2장. 부킷 빈탕, 우당탕탕


 크리스마스이브 날, 이름도 희한한 부킷 빈탕 Bukit Bintang에 왔다. 투어 버스가 출발하는 곳이다.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 한가운데 있는 이 지역은 말하자면 이태원 경리단길, 홍대 앞 골목, 압구정 로데오 같은 핫플레이스를 버무린 번화가였다.


- 딸, 부킷 빈탕 하니까 뭐가 떠올라?

- 감자탕, 무탕, 탕탕탕탕 탕수육. 아빠는?

- 음… 머리가 굳어서 하나도 안 떠올라.

- 플레이 도우처럼? 머리 뚜껑이 열려 있었구나.

- 플레이 도우라면, 그 밀가루 반죽 같은 거?

- 응, 오래 열어두면 딱딱하게 굳어버리거든.


 이른 저녁으로 미디엄 레어로 구워낸 소갈빗살 스테이크와 티본 스테이크를 먹었다. 입안에서 자꾸 고기가 녹아내려 씹을 겨를이 없었다. 이곳이 천국이라 확신이 들 무렵,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는 녀석의 모습이 야속하게 보이는 것 같다.

"원래 씹으면 삼키라는 신호가 오는데 지금은 신호가 안와"

 집에서 내가 구운 고기에 까탈을 부리고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며 하던 말이다.

 연신 맛있다고 감탄하는 말에 내 기분이 왜 나빠지려는지 모르겠다. 분명 기분 탓일 것이다.


 한껏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감에 젖은 우리 세 식구는 한 시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뻥 뚫린 이층 좌석에 앉아 상쾌한 밤바람을 맞는 게 이층 버스의 묘미다. 딱 스물일곱 좌석에서만 가능한 일이었기에 서둘러야 한다. 부지런한 몇몇 가족이 벌써 와서 줄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녀석이 놓친 크리스마스 파티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싶었다. '딸~ 이층 버스에 타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썰매 타는 기분이겠다~'라고 분위기를 띄우는데, 손에 든 아이스크림으로 이미 최고조에 다다른 녀석의 기분을 더 이상 맞출 필요는 없어 보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쿠알라룸푸르 야경을 즐기기로 했다.



3장. 외계인이 사는 집


 

머리 위에 뻗어있는 선로를 따라 모노레일이 지나갔다. 도심을 가로질렀다. 이어 옮긴 시선의 끝자락에는 서늘한 빛깔의 빌딩이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불현듯 시상이 떠올랐다. 이런 것을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것은 도시의 차가운 뒷모습, 쓸쓸함이 밀려오는 것 같아."

아내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하하하, 도시의 차가운 뒷모습이래. 그게 뭐야, 왕 유치해."

"왕이라니, 왕이라는 게 더 유치하거든?"

 부모가 서로 더 유치하다고 다투거나 말거나 딸의 시선은 도시의 야경을 향했다.

말레이시아의 랜드마크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가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움*으로 빚은 빌딩이 불빛을 반짝인다.


1996년 3월에 완공한 트윈 타워와 극동건설이 연결한 스카이 브리지

 말레이시아의 두 번째 랜드마크인 KL 타워는 시애틀의 스페이스 니들을 닮았다. 오늘 밤은 왠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참고).

 딸기와 아내는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의논하는 듯 보였다. KL 타워를 올려봤다 다시 이야기 나누기를 반복했다. 감상에 관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은 모양이다.


- 외계인이 탄 우주선이 광선을 내리고 있는 것 같지.

- 응, 엄마. 외계인 집 같아.


 말레이시아의 자랑이자 두 번째 랜드마크인 KL 타워는 안타깝게도 외계인이 사는 집과 우주선이 뿜는 광선으로 요약되고 말았다.


 버스에 두 시간을 앉아 있어서 엉덩이가 아파져 올 무렵, 출발했던 장소로 다시 돌아왔다. 녀석은 퍽 만족스러워했다. 줄리아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완전히 잊은 듯 보였다.

 이만하면 성공이다.

 


4장. 그래도 베스트 크리스마스


 그날 밤 딸기는 어느 때보다 서둘러 잘 준비를 마쳤다. 긴 투어에 피곤하기도 했겠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빨리 잠이 들어야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놓고 가신다는 거였다. 이층 침대로 후다닥 뛰어 올라가는 녀석의 얼굴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문을 닫고 나오기도 전에 이미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꾹꾹 눌러쓴 손 편지는 무사히 전달이 된 모양이다. 어린이용 자외선 차단제 콤팩트 화장품과 매니큐어 세트가 예쁜 포장지에 싸여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전구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이다.


"꺄아아아~~~ 엄마~ 아빠~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고 가셨어!"

"우와, 진짜? 언제 놓고 가셨대. 전혀 몰랐네~"

"내가 달라는 선물도 그대로 주셨어!!"


크리스마스 아침, 녀석은 산타가 다녀가셨다는 것에 잔뜩 흥분했다. 포장지를 뜯고는 급기야 엉덩이와 팔다리를 흔들며 온 집안을 뛰어다니는 보니 얼핏 오랑우탄 새끼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선물 포장에 공을 들인 엄마 산타의 표정이 흐뭇하다. 나는 손 편지를 작년보다 좀 더 정성스럽게 썼다. 편지를 본 딸이 말했다.

"산타 할아버지 글씨체가 좀 바뀌었네. 조선 글씨 같아."

 내 글씨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궁서체를 흉내 냈더니 조선 글씨가 되어버렸다. 여하튼, 이 모든 것은 비밀이다.


 그날 오후 급히 오픈한 딸기 네일숍에 반강제로 소환 엄마는 손톱이 남아나질 않았다. 내 손톱 역시 네일아트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내 왼손 지를 예쁘게 꾸민 '러블리 스폿티 스카이' 작품 마성을 가진 것 같다. 자꾸 보게 된다. 이래서 네일아트 노래를 불렀나 보다.


 눈물바다로 서막을 알린 쿠알라룸푸르 이층 버스 야간 시티 투어였지만, 함박웃음으로 끝이 났으니 더 하나 바랄 게 없다. 거기다 녀석은 자기 결혼식에 할 네일아트 작품 '럭셔리 스폿티 스트로베리'감까지 끌어내는 쾌거를 이룩했으니 이번 크리스마스도 최고였다 자평할 수 있겠다.

 이제 해피 뉴 이어에는 뭘 해볼까. 끝.




*

트윈 타워는 1993년 우리나라의 삼성물산과 일본의 하자마 건설의 주도하에 각국의 여러 건설사가 합작 형태로 수주받아 건설됐다. 당시 말레이시아 국가 경제발전 전략의 상징이 될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이 건물의 동쪽을 맡은 우리나라와 서쪽을 맡은 일본은 서로 먼저 완공하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한일 자존심 싸움이 재연된 것이다. 초고층 빌딩 건설의 경험이 전혀 없는 삼성물산과 극동건설에 비해 풍부한 경험을 보유한 하자마 건설회사는 이미 한 달 앞서 착공했기에 명백하게 불리한 시작이었다. 전 직장의 클라이언트였던 삼성물산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건축 실력을 얕봤던 일본은 시공 중에 우리 동쪽 타워가 기울어졌다며 문제를 제기했어요.
몇 번이나 검증했지만 우리는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기울어진 쪽은 일본의 서쪽 타워라는 걸 알게 됐죠. 자만했던 일본은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보강작업을 서둘렀지만, 우리보다 10일이나 완공이 늦어지게 된 거죠. 시작은 늦었지만, 명실공히 세계 초고층 빌딩은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짓게 된 겁니다."

동남아 최고 높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이 될 Merdeka 118 또한 우리나라에서 내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표지 그림: ET Pr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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