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애틱 Dec 23. 2021

몽키 댄스

일곱 살 내딸기 2511일



"원.투.쓰리.포! 쿵짝, 쿵짝, 쿵짝, 쿵짝"

경쾌한 리듬을 얹은 신나는 기타 소리가 무대에 퍼다. 왼손을 허리에 얹고 오른손 검지를 무아지경이 되도록 하늘로 찔러대는 저 아이는 누구 말인가. 126 bpm 템포에 따라 무릎 딩으로 바운스를 튕대며 관객 호응을 살, 연습 때처럼 양쪽 겨드랑이에 두 손이 정확히 올라는지 확인하는 여유부리 저 아이, 어떤 성격인지 제는 갈피를 못 잡겠다. 혼란스럽다. 러거나 말거나 음악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속절없이 흘러다.




딸의 둘째 발가락은 엄지발가락보다 좀 더 길어서 나와 똑 닮았다. 각진데라고 없는 얼굴은 잘 빚은 만두 같아 아내와 똑 닮았다. 여기저기서 골고루 떼어 잘 버무린 생김새이다.

당신 얼굴은 브이라인인 줄 알고 그런 소릴 하냐며 다그칠 아내를 생각하니 실언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여하튼, 엉뚱한 짓이 수위를 넘어 어처구니가 없어지면 널 닮았네 난 아닐세, 서로의 우성적인 유전자를 탓하느라 설전이 벌어지고는 하는데 둘 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건 바로 녀석의 내성적인 성향이 어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두 부모는 누가 봐도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7년 두 돌이 될 무렵 살던 미국 집 근처에는 놀이터가 많았다. 바닥을 모래가 두툼하게 덮고 있어 온갖 모래 장난감나타났다. 모래를 부으면 뱅글뱅글 돌아가는 물레방아부터 굴착기, 덤프트럭, 불도저, 삼지창, 바구니, 모종삽 등 종류가 다양했다. 녀석이 유난히 관심을 보인 것은 조리 도구를 본 딴 숟가락, 뒤집개, 거품기, 포크, 국자, 젓개였다. 소꿉놀이 요리 세트로 무장한 녀석은 모래를 퍼담은 그릇을 내 턱 밑에 갖다 대고 '맛있어, 멋있어'라며 입에 퍼넣는 시늉을 즐겼다. '냠냠, 아이~ 맛있어'라고 받아주면 퍽 흡족해하는 표정을 짓던 곳이었다.


그곳은 해적 통 아저씨 룰렛 게임 같은 곳이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 예고 없이 툭 튀어나와 사교를 해야 할지 모르는 장소였는데, 내성적인 사람에겐 벅찬 분위기의 전운마저 느껴지는 곳임엔 틀림없다.

한날은 아내가 딸을 위해 비눗방울을 불어 준 적이 있다. 별안간 사방에서 달려든 꼬마들이 흩날리는 비눗방울 속에서 춤추고 날뛰었다. 기대에 부응하느라 멈출 수도, 그렇다고 계속 불 수도 없 어정쩡한 상황에서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있는 아내 때문에 배 잡고 웃었다. 포복절도와는 상관없이 다시는 비눗방울을 가지고 놀이터에 얼씬하지 않겠다는 교훈을 얻도 한 이곳의 분위기는 녀석이라고 비껴갈 재주가 있던 건 아니다. 


시작은 붙임성 좋은 여자아이가 다가와 바닥에 놓인 국자를 집어 들며 같이 놀자는 신호를 보내면서부터였다.

생글리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다. 두 손바닥을 쫙 펴서는 좌우로 부들부들 흔들며 어쩔 줄 몰라했다. 급기야 너무 싫은 벌레가 나오거나 손에 찝찝한 게 묻었을 때 내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뽀물 뽀물!'

기저귀 찬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도망가는 뒷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모래보다 더 씁쓸한 뒷맛이 남았던 건 비눗방울을 들고 절대 놀이터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우리의 사교성 결핍 행동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딸의 네 번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말레이시아로 오게 됐다. 그전까지 녀석은 피붙이 가족과 단 삼십 분도 떨어져 본 적이 없. 그런 딸을 이곳 한국 유치원에 보내던 첫날은 걱정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낯가림도 심하고 내성적인 녀석 낯선 환경에서 혼자 겪을 두려움이 쓰러웠다.

'오빠, 유치원 선생님이 그러는데 끝날 때 집에 가기 싫다고 울었대.'라는 아내의 전화에 안도감과 이유 모를 배신감이 들어 매정한 녀석이라며 두고두고 씹어댔던 것은 별개의 일이다.


두어 달 후 날아든 가정 통신문에는 크리스마스 장기자랑을 준비했으니 학부모님의 참석을 바란다는 내용이 꼬물꼬물 담겨 있었다. 연습한 걸 절대 말해주지 않는 녀석의 무거운 입을 야속해하며, 가장 학부모답게 차려입고 도착한 유치원에서총 네 번을 놀란 것으로 기억한다.


첫 번째로 칠십여 명의 많은 한국 사람이 한데 모인 광경에 놀랐고, 두 번째로 자주 안아주고 예뻐해 줘서 엄마 다음으로 좋다던 무자 Muzzar 선생님의 코를 관통하는 소코뚜레 피어싱에 놀랐고, 세 번째로 록 스타가 재림한 듯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한 선생님과 미취학 아동들이 부모님을 위해 무대를 준비했다는 아기자기함에 놀랐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네 번째였다.


오합지졸과 아비규환으로 요약할 수 있는 무대 퍼포먼스의 수준은 논외로 하고, 유치원을 빽빽하게 메꾼 관중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홀린 듯 춤추는 녀석의 대담함이 매우 놀라웠다. 누가 울든, 주저앉든, 노려보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퍼포먼스에 열중하는 녀석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2018년 12월 21일, 크리스마스 재롱잔치



2021년 12월 현재.


"엄마 나랑 결혼해 줄래?"

집 앞 풀밭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조몰락거리며 만든 꽃다발을 엄마에게 준다.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주는 거야.'라고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 소외감이 드는 것은 내 기분 탓일 테니 못 들은 것으로 해야겠다.

혼자서 조용히 사부작거리길 좋아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새로운 동네에 이사 온 지 일 년 반이 넘도록 동네 아이들과 내외하 있으 삼 년 전 대담한 그 모습은 일회성으로 지나가는 해프닝이었나 보다 여 무렵, 또 하나의 일이 생겼다.


우연히 집 앞을 얼쩡거리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였다.

 "아빠, 저 친구한테 가서 말 걸어볼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보고 있어야 해."  

자기 곁을 지키겠다는 확인을 받고 쭈뼛쭈뼛 그 아이에게 다가섰다. "팝잇 가지고 같이 놀래?"

이렇게 사귀게 된 동네 친구들과 노느라 얼굴이 새까맣게 타버린 지가 이제 한 달이 갓 지났다.


- 아침부터 나가서 놀다 온 거야?

- 응, 너무 놀고 싶어 가지고 아침만 허리허리(hurry)하게 먹고 나갔지.

- 근데 새로 사귄 친구들은 몇 살이야?

- 몰라, 안 물어봤는데.

- 혹시 (만) 여섯 살 동갑 아닐까? 비슷해 보이던데.

- 나이를 왜 꼭 알아야 해? 여섯 살아~ 하고 부를 것도 아닌데?

- 아… 그건 그렇지. 


남의 집 망고 나무에서 떨어진 망고 주워 오기, 나무 이파리와 잔디 뜯어서 요리하기, 자전거와 킥보드 타기, 목적 없이 뛰어다니기, 야자수 잎 꺾어서 지붕 만들기, 돗자리 펴놓고 티타임 갖기, 호스로 물 뿌리기 등 노는 것도 다양하다. 원어민 발음으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동네 아이들에게 전수하기도 했으니 외교 사절단의 역할도 병행했다. 참고로 주워 온 망고 맛이 퍽 달고 괜찮았기에 해당 활동을 장려할까 생각한다.


"엄마, 아빠! 빨리 와봐!! 저기 신기한 게 있어!"

"신기한 게 뭐야, 엄마랑 지금 '놀면 뭐하니' 볼 건데"

"진짜 신기하다니까. 거북이가 있어! 얼른~"


자다가 봉창도 두드려도 이보다는 덜 기상천외하겠지만 녀석은 답답하다는 듯 자꾸 손을 잡아당다. 이 정도 호들갑을 달래려면 따라나설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커피잔을 든 그대로 아내와 밖을 나섰다. 베스트 프렌드가 된 앞집 친구 쥴리아와 나란히 서서 수풀 속을 가리키는 모습이 귀여웠다. 방정맞은 손가락을 따라 정원 수풀로 시선을 옮겼다.

고개를 빳빳하게  바가지 크기만 한 거북이 보고 놀란 아내 커피잔을 내던지일보직전이었다.


수풀 깊숙이 앉아 있는 거북이는 어떻게 발견했고, 이 거북이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이며, 왜 거북이를 상자에 담아 돌아다녀서는 동네 어른들을 기겁하게 했는지에 관한 내용은 담지 않겠다.




밖에서 놀다 돌아온 온 녀석은 농민 봉기라도 한 듯 산발이 되어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한다. 제 새끼 입에 음식 들어가는 모습은 늘 흐뭇하다.


- 아빠, 밥 먹는데 왜 보고 있어?

- 먹는 거 예뻐서 보고 있지.

- 부담스러워. 그냥 브런치나 보고 있어.


밥 먹는 걸 누가 지켜보고 있을 때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노무….

아, 그렇다. 원래 돌직구를 즐겨 날리던 녀석인데 잊고 있었다. 그래, 성격이 내성적이면 어떻고  무렴 어떠냐. 무조건 건강하고 즐겁게만 지낸다면 더 바랄 게 없으니 이거면 됐다.


새까매진 얼굴에 반짝이는 눈빛으로 새로운 하루를 맞다. 아침마다 빼꼼히 방으로 들어와 나를 안아준 뒤 미적대다가 다시 제 할 일을 하러 가는데, 오늘은 뜬금없이 일하는 중에 전화를 걸어 잘 잤냐고 묻는다. 몇 마디 주고받고는 녀석의 방으로 갔다. 침대에 앉아 나와 눈을 마주치 활짝 웃어주는 녀석의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걸 본 건 내 착각이겠지.


월이 오면 한 달짜리 방학도 막을 내리고, 고사리손을 꼽아가며 기다리던 학교가 드디어 시작한다. 녀석의 소원대로 다시는 온라인 수업을 하지 않도록, 친구들과 학교에서 재밌게 놀 수 있도록, 부쩍 착한 일을 몰아서 하는 녀석의 소원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호..호!

 





* 여흥이 남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분이 계신다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The Wiggles - The monkey dance  https://www.youtube.com/watch?v=jdZ-sjwoChI


면책조항

주변 경계를 소홀히 하고 어깨와 엉덩이를 들썩이다 발생하는 부끄러움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사진 출처: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우린 모두 소중한 생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