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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애틱 Nov 11. 2021

삥s.

말레이시아 경찰의 탈선

 1.


"야, 이리 와봐."


어느 날 아침, 학교 가는 골목길에 키가 한 뼘은 큰 아이가 손짓하며 말했다.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였다. 누구인지 몰라 머리를 짜냈지만, 인사 한번 나눈 적 없는 다른 반 아이라는 추측 외엔 떠오르는 게 없었다. 홀연, 일진과 어울리며 그 주변을 위성처럼 맴돌던 아이의 잔상이 연기처럼 피어났다. 그러고 다시 보니 얼굴은 불량한 표정으로 가득했다.


그 순간이 온 것인가. 갓 중 2로 올라간 친구들이 앞다퉈 나눈 경험담은 미적거리는 내게 빨리 결론을 내라고 옆구리를 찔러댔다. 어쩌지,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돈 있는 거 좀 내놔"

올 게 왔다. 이것은 삥의 순간이다.


순진한 친구들이 나눈 삥의 경험은 다채했다. 하굣길 집에 가다, 오락실서 게임 하다, 학원에서 공부하다, 길을 걷다 이유 없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돈, 소니 워크맨, 나이키 농구공, 리복 펌프 농구화, 지쇼크 손목시계, 테트리스 오락기 등 종목도 가리지 않았다.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친구들의 경험담에 덧붙일 이야깃거리가 없던 나는 공감의 표시로 욕나 보탤 뿐 가만히 들을 때가 많았다. 한번도 겪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눌 이야기가 생기나 보다. 친구에게 들려줄 이야기 아마 이렇게 시작것 같다. '너희 아침 등굣길에 삥 뜯겨봤니?'


친분 없는 동급생의 능숙한 리드에 지갑을 꺼내려다 퍼뜩 정신들었다. 주머니 사정은 뻔했다. 용돈을 탈탈 털어 산 공격형 헬리콥터 AH-64 아파치 플라스틱 모델 때문에 보릿고개가 들이닥친 상황에서 삥을 앞둔 긴박한 시점이라고 풍년이 들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 없어, 라는 창의성 떨어지는 말을 하기는 싫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국민학교 시절 학급지도위원으로 타의 모범뿐 아니라 급우들의 방정한 품행에 힘썼던 지난날 떠올랐다. 영혼의 굴욕을 허락지 않던 중2병 청소년은 이대로 당하기에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녀석의 주먹을 얼굴로 막아낼 준비를 마치고 말했다.


"네놈 줄 돈은 없어!"


성장호르몬이 참사를 빚어냈다. 솔직했어야 했다. '내가 쓸 돈이 없는데, 널 줄 돈도 없지 않겠니.'라고 해야 했던 게 맞다. 하지만 입은 마치 '내가 쓸 돈은 있지만 너에게는 주지 않겠다'라고 오해 살 법한 소릴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이 새끼가 돌았나…." 녀석은 시나리오에서 벗어난 난감한 상황에 당황한 눈빛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후로 이십 년간, 결코 대가 없이 돈을 뺏긴 적 없는 인생을 살았다.

비록 스티로폼에 든 저질 가오리를 고급 생선으로 속아 자랑스레 사 온 적은 있어도, 전원 케이블이 없는 빈 상자를 5.1채널 스피커로 속아 뿌듯하게 사 온 적은 있어도, 최소한 사기꾼의 창의적 결과물과 등가교환 한 셈이니까 돈을 뺏긴 건 아니지 않나. '……'


여하튼, 내 인생에 삥땅은 있어도 삥 당한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삥이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무결한 삥신信의 삶이라 자부했다.

그때까지는.



2.


방학을 맞은 조카가 말레이시아로 왔다. 쿠알라룸푸르 KL 공항 픽업은 처음이다. 공항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설레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 역시 가득한 설렘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입구 부근 두 갈래 길이 나왔다. 근처에는 정차한 여러 대의 차들이 보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갈림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었다. 말레이시아의 복잡한 도로에 적응하기 전이라 놓쳤을지도 모른다. 잠깐 망설였지만 길게 고민할 수 없었다. 벌써 반가운 얼굴이 입구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얼른 조카와 매형이 가까운 왼쪽 길을 선택했다.

 

가족을 외국 공항에서 만나면 훨씬 더 반갑다. 뒤차의 흐름을 막지 않기 위해 서둘러 인사하고, 짐을 실은 트렁크를 여물게 닫았다. 조수석에 앉기 위해 운전석으로 향하는 매형을 저지하고 차를 움직였다(말레이시아의 자동차는 좌우가 바뀌어 있다. 좌측 통행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20미터를 움직이고 난 후였나 보다. 어디서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수신호를 보냈다. 멈추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공항 입구에서 어중된 거리에 멈춰 선 승용차와 오토바이 몇 대가 눈에 들어왔다.

 

수신호를 한 경찰은 하얗고 동그란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었다. 정갈하게 다려진 흰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 제복을 입은 교통경찰의 어깨에는 무전기 핸디 마이크가 걸려 있었다.


- 운전면허증과 신분증 주십시오.

- 아, 네… 여기 있습니다.

- 잠깐만 기다리세요.


두 가지를 받아 든 경찰은 자리를 옮겼다. 불러 세운 이유를 알 수 없어 긴장한 모습으로 기다렸다. 말레이시아에 처음 놀러 온 조카와 매형도 같은 표정이었다. 괜히 놀라게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동료와 논의를 마친 경찰이 돌아왔다.


- 두 가지를 위반하셨습니다.

- 두 가지나 위반하다니요?

- 첫째는 차선 위반, 둘째는 여권 미소지입니다.

- 여권 대신 아이카드 드렸잖아요.

- 이건 안 됩니다, 외국인은 반드시 여권을 가지고 다니셔야 합니다.


말하자면 1) 택시만 사용할 수 있는 차선을 일반 차량이 이용한 것, 2) 외국인이 신분증으로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길 안내 표지판을 못 본 건 내 불찰이다. 그런데 두 번째 위반 사항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레이시아 이민국 직원의 안내가 생생했다. 거주자에게 발급하는 아이카드 i-kad*는 여권 대신 신분증으로 쓸 수 있다고 했다. 거주자가 늘 여권을 가지고 다니면 불편하고 분실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친절한 설명이 인상 깊었던 터라 기억이 또렷했다.


- 저는 말레이시아에서 거주하는 사람이라 여권이 필요 없어요. 아이카드를 신분증으로 쓸 수 있다고요.

- 외국인은 반드시 여권을 소지해야 합니다, 두 가지 위반으로 범칙금 각 300링깃, 총 600링깃입니다.


600링깃을 환산하면 십팔만 원 정도이다. 하필 십팔이냐, 탄식이 샜다. 말이 더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십팔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곱씹으며 지새울 밤들이 눈앞에 흘렀다.


- 지금 이 기계로 티켓을 끊습니다. 이제 입력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티켓 단말기를 보여주며 입력 버튼을 누르기 직전, 말을 이었다.

- 특별히 지금 현금으로 내시면 티켓을 500으로 할인해 드리겠습니다. 납부까지 대신해드리지요.


참신한 제안이다. 벌금 할인 특혜를 주거니와 납부 대행 서비스까지 제공하겠다는 말 아닌가. 어차피 내야 할 벌금 조금이라도 싸고 편하게 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경찰서를 가야 다는데, 경찰서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옆에 있어 얼른 난리 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뭔가 석연치 않고 편법의 냄새가 술술 풍겼지만 지갑을 살폈다. 공격형 헬리콥터 AH-64 아파치를 사던 중학교 시절의 보릿고개는 이유를 알겠는데, 지금은 왜 이런 건데.


- 저… 지금 현금이 많이 없어요….

-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법질서를 수호하는 말레이시아 교통경찰의 안내는 친절했다. 공항 안쪽을 가리키며 ATM 기계가 있으니 현금을 뽑아오면 된다고 한다. 차는 여기 두고 가도 된다고 편의까지 봐주었다. 멀뚱한 조카와 난처한 매형이 눈에 밟혀 현금을 쥔 뜀박질이 빨라졌다. 차로 돌아오니 클립보드를 내밀었다. 공항 위에 붙어 있는 CCTV를 의식하며 말했다.


- 차 안에서 여기 사이에 돈을 넣어 주세요.

- 잉? 왜…. 일단, 오케이.

- 좋습니다. 혹시 다음에 또 위반해서 잡히면 이번 일을 얘기해 주세요. 그땐 특별히 봐 드릴게요.

- 아… 네….

- 조심히 가십시오. 굿바이.


그로부터 며칠 뒤,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 이민국 직원과 경찰과의 문답에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아이카드는 거주자 신분증 대용이라 여권은 필요 없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공항에 있는 경찰이 그걸 모를 리 없다고 했다.


내면의 동굴에서 글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어지러웠다. 곧이어 천천히 그리고 정확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편법에 눈감고 편승하려던 자의 끝은 수치, 자책, 후회, 손해의 눈물로 얼룩졌다. 만약 그때, 됐으니 티켓이나 끊으시오, 라고 했다면 택시 레인을 잘못 이용한 벌금으로만 끝났을 거다. 여권 미소지로 티켓을 끊었더라도 아이카드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 무효로 할 수 있었을 테다. 한 달 평균 급여가 백십만 원이라는 말레이시아 일개 경찰의 탈선을 탓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말레이시아에 처음 온 조카였다. 그 앞에서 이런 일을 생기도록 방치한 내 부끄러움과 자괴감 때문에 이불을 수없이 찬 날들만 남았다.


다시는 이런 부끄러움이 스며들지 않도록, 정직하고 당당하게 살자 다짐했다. 어쨌든 나도 이제 덧붙일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구에게 들려줄 이야기 아마 이렇게 시작것 같다. 

'너희 경찰한테 삥 뜯겨봤니?'



*현재 2021년 11월 기준, 지금은 아이카드는 더 이상 발급해 주지 않습니다. 이제는 거주자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외국인은 반드시 여권을 신분증으로 소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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