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진 WonjeanLee Aug 06. 2019

아주머니가 나가셨다.

아주머니와의 동거인생 9년이 마무리됐다. '청소 끝 철학'의 출발이다.

아주머니가 집을 나가셨다. 


이로써 첫째가 태어나던 해인 2008년부터 시작된 입주 아주머니 5년-> 미국에서 일주일 한번 오시던 아주머니 1년-> 한국에 돌아와 월수금 오후에만 오시던 아주머니 3년의 역사가 마무리됐다.  

총 9년의 아주머니와의 동거 인생이 일단락됐다. 

남편과는 더이상 아주머니께 기대지 않고 살아가보기로 합의했다.

그 사이 참 이모님을 구하기 위한 절차도 복잡해졌고, 사실 세상도 많이 변했다. 

음식업체들은 새벽 배송을 시작했고, 청소 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집 배달 서비스인 배달의 민족, 푸드플라이, 우버 잇츠, 그리고 요기요 등의 배달시장도 변동하고 있다. 

사실 이제는 아주머니는커녕 부모도 필요 없는 양육의 무인시대가 된지도 모른다.  


미국행이 결정되고 난 후 가족 같던 입주 아주머니가 나가시고 나자

나는 6개월 된 막내를 동네 가정어린이집에 넣고 회사를 그만둔지 얼만 안됐지만, 

이제는 혼자 할 수 있을 거라며 박사학위 과정을 밟으러 주간 학교에 갔다 왔다.   

첫째는 초등학교 병설 어린이집에, 둘째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하굣길에 아이 셋을 찾아서 자전거에 큰 수레 바구니를 달아 몰고 용감하게 거리를 활보했다.   

봐라. 집안의 막내였던 늘 애기 취급받았던 나도 이렇게 용감하고 씩씩하다. 

아마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을 거다. 

보란 듯이. 머리를 흩날리며.


그렇게 기개를 부린 후 남편과 참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나는 새로 바뀐 일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책도 많이 읽어야 했다. 

책을 읽다가 자세는 점점 기울고 급기야는 누워서 보기 일쑤였다.

논문을 쓸 때는 밤을 새웠다고 낮에 자기 일쑤였다.

남편은 입주 이모님이 가시고 난 빈자리가 다 자기의 몫이 됐다며 푸념했다.

더러운 집과 아이의 방치에 대한 인내도가 더 낮은 남편이 자꾸 일을 맡아하게 됐다.

"저렇게 누워서. 게으를 수가 있나. 애들에게 관심을 좀 보여봐"

"놔두면 내가 한다니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잖아. 너무 결벽 강박 아니야?" 

그러면서 나는 점점 게으름뱅이가, 남편은 점점 강박증 환자로 서로에게 낙인 되기 시작했다. 

너무 피곤해서 둘 다 악에 받칠 때면,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기 일쑤였다. 

서로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육아노동의 빈자리는 서로의 시간을 죄다 채워 넣고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이 광활했다.   


때로는 브런치에서 연재 중이던"이혼하는 중입니다"라는 글을 보고 서로 돌려보며 

우리랑 뭣이 같고 뭣이 다른가를 분석하기도 했고

페미니즘 이론으로 무장해서 젠더 감수성 부족한 남편을 응징하기도 했으며 

(사실 내 기준으로도 상당히 이미 높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당에서 하는 ME(Marriage Encounter)프로그램을 통해  영성으로 부부관계를 극복해보려고 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산전수전을 다 겪고서 

9년 차 아주머니가 집을 나가신 아니 어쩌면 쿨하게 보내드린 상황에 직면했다. 

이제는 돌아와 국화 앞에 선 누이처럼

나는 충분히 노화했고

남편과의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나갈 지혜도 갖췄으며

무엇보다 오늘 

<청소 끝에 철학>이란 책을 찾아낼 매의 눈을 갖췄다.  

소제목도 멋지다. 

"쓸고 닦았더니 사유가 시작됐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88248179&orderClick=LAG&Kc=


요즘 나를 사로잡곤 했던 우울증은 어쩌면 청소가 되지 않은 집에서 생겨났을지 모른다.  

나는 소위 철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인데

더구나 가장 현실적이고 일상을 탐구하는 유학을 연구하는 사람인데

어쩌면 가장 리츄얼에 약하고 

어쩌면 가장 일상적인 청소를 경시했다.  



유학경전 <소학>에서는 "쇄소응대"란 말이 있다. 


소학

小學

교인이쇄소응대진퇴지절 

敎人以灑掃應對進退之節

애친경장융사친우지도 

愛親敬長隆師親友之道

개소이위수신제가치국평천하지본 

 皆所以爲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本  


 소학에서 사람을 가르칠 때 ,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히 하는 방도로써 했다. 

이는 모두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는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히 하는 근본이다.’고 했다.   

물론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청소(灑掃)교육이 으뜸이라는 거다. 
여기서 쇄(灑)는 물을 땅에 뿌려 먼지를 적시는 것을 

소(掃)는 비를 땅에 대고 움직여 먼지를 제거하는 행위를 말한다.

청소에도 이렇듯 순서가 있다. 이 과정에서 마음에 절제가 깃든다.


소학에 따르면 이렇게 청소하고 난 다음에

行有餘力誦詩讀書(행유여력송시독서)

'행유여력' 즉  힘이 남으면 그때 시를 외고 책을 읽는다.

'청소 끝에 철학'은 소학의 '쇄소응대 행유여력 송시독서'와 같다. 

작가님의 혜안이 빛난다.

소위 청소의 레벨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른바 청소 만렙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공부할 자격도 없다는 것. 

하물며 가장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철학이라니 

'떼끼'다.


내 문제의 근원이 갑자기 쏴악 벌겨벗겨지는듯했다. 

개안이다.

그래 아주머니의 가출은 나의 깨달음 즉 구도의 길을 밝혀주는 일대 사건이다!


주자는 묻는다. 

"이미 나이가 들어서도 공부가 여기에 미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지나간 세월은 따라잡을 수야 없지만 그 공부의 순서와 조목이야 보충하지 못하겠는가. 불행히 때를 놓친 뒤에라도 학문하는 사람이 진실로 경에 힘써 대학에 나아가고 소학도 아울러 보충하면 그 나아가는 것에 장차 근본이 없어 도달하지 못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분기점에 서있다. 

이미 나이는 들었지만

어쩐지 공부가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지나간 세월이야 어쩌지 못한다지만

불행히 이렇게 때를 놓쳤더라도

(좀 봐줄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직장맘이었다. 아니 대놓고 봐줘야 한다. 

아주머니로부터의 독립은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기에 가능한 일이고 

아이가 여러 명이기에 가능한 일일 수 있다. 

또 엄마가 또는 부모가 다 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러나 아주머니에 기대 살아가는 

소위 기생하는 워킹맘의 정신도 그다지 건강하지 않을 수 있음을

그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해보는 것이다.

솔직히 오늘날 우리 가정을 포함해 가정의 많은 문제가 

여기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페친께 힌트를 얻은

40+20의 작업법을 사용해 볼 자신감도 생긴다. 

1시간 중 40분 즉 정각에서부터 40분까지 집중해서 일하고, 20분은 집안일이나 요가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다. 소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매우 짧은 단위의 방법이다. 

일종의 헬스에서 서킷 운동이라고나 할까 아니 타바타 운동인가?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일 것도 같다.

물론 아이도 같은 방식으로 생활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더구나 지금은 초등 아이들 방학이다!)

https://starlakim.wordpress.com/2019/06/29/4020-%ec%9e%91%ec%97%85%eb%b2%95/?fbclid=IwAR0KubKJEAIMdbWZ40UzQaJlkiprhGSEKHpLdLwtoKSo9swZ51Yu3AzEZtE


다시 되돌릴 수 있으니 염려할 필요 없다. 

도달할 수 있다.

늦은 때란 없다. 


때로는 어질러질 수도 있지만

쇄소응대부터 

소학의 첫걸음부터

이제는 자식들과 같이

(너는 글을 써라. 나는 떡을 썰 테니) 아니

(너는 이불을 빨거라, 나는 밥을 할 테니)

걸을 테다.


그래서 청소 끝에 철학한다.

아주머니, 저 잘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새벽 배송, 청소 앱 그래도 믿을 구석이 있어 다행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블랙미러로 철학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