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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진 WonjeanLee Oct 03. 2016

자식에 대한 양가감정

엄마이자 여성에게 '자기신체 결정권'을 허하라.



나는 아이를 세 명 낳았다. 

어떻게 낳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라가 키워준다고 해서 낳았는지도 모른다.


얼핏 6주부터 20주까지 엄청난 입덧을 겪었다는 기억만 선명하다. 

회사 선후배들은 요즘 나를 만나면 “많이 날씬해졌네”라고 인사를 건넨다. 

내 몸무게가 고정적으로 절대지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은 아마 나를 늘 임신한 상태의 63kg의 ‘부은 엄마’로 기억하는 게 분명하다. 

누군가 입덧-출산-육아 중에 무엇이 가장 힘드냐는 투표를 던진 적이 있는데, 

나는 입덧이 가장 힘들었다. 


그래도 셋을 낳아야 할 이유는 있었다. 

딸을 낳아야 해서다. 

하나만 낳아도 딸, 둘만 낳아도 딸, 셋을 낳아도 딸. 

내가 딸을 못 낳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둘째까지 아들을 낳고서 절실하게 셋째를 낳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 고민했다. 

내가 각고의 노오력 끝에 이 회사에서 가장 성공한 커리어로 50살이 됐다고 치자. 

그때 가장 후회할 일이 뭘까. 

아마 딸을 낳지 못한 것. 아니 못 낳았더라도 낳으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것이 아닐까. 

결론을 냈다. 그리고 감행했다. 

셋 다 모두 계획임신, 자연분만이었다. 입덧을 제외하고는 대충 수월했다. 

워킹맘이어서 임신기간이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출산드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역시 기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쩔때는 내가 애를 왜 이리 많이 낳아서 이 고생이야.

똑똑한 여성들이 저출산인 건 이유가 역시 있었어. "

라고 푸념했다.

엄마의 자식에 대한 양가감정은 수시로 고개를 쳐든다. 

그래서 양가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두 가지의 엄마 책을 검토해보려고 한다.

<엄마됨을 후회함>(오나 도나스)와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바바라 아몬드)란 작품이다. 


#1. 엄마됨을 후회함 Regretting Motherhood


이쯤에서 나오는 문제는 

바로 출산결정권이다.

나는 스스로 셋에 대한 출산을 결정했다. 

그걸 추동시킨 건 딸을 낳으려는 열망이었다. 

출산결정권은 내 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다. 

여자라고, 

결혼을 했다고

무조건 아이를 낳을 의무는 없다. 


어렸을 때 엄마가 매일 책상 위에 올려주셨던 

기사 스크랩 중에 페루의 작가 

'이사벨 아옌대'의 기사가 있었다.

그녀는 여기서 아이를 몇 명을 낳을지 

심지어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서 밥을 차릴지는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고 했다. 

당시의 나는 이 발언이 굉장히 충격적이면서 

멋졌다. 잠깐 기사를 인용해보겠다. 




“내가 쓰는 모든 작품들은 자전적 요소를 갖고 있다. 왜 나는 어떤 것을 쓰려고 작정했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엘리사는 내가 아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자유를 찾아나서는 것, 그리고 자유를 향한 엘리사의 갈망은 내 것이다.”

-당신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 것에 대해.

“나는 단 한 번도 문학을 공부해본 적이 없다. 나는 리뷰를 쓰지도 읽지도 않는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10권의 소설을 썼다.
나는 나의 음조를 가지려고 했고, 나의 언어를 가지려고 했으며, 나는 나 자신이려고 했다.
나는 매우 다양한 독서를 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신은 소설에서 여성의 성적 욕망과 성적 행위의 자유로움을 남성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가정의 가치관과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여성을 성적인 동물로 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문화권은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구현하도록 짜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의문을 갖게 됐다.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의 성을 사용할 것이며,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낳을 것이다.
이것은 여성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온전하게 자신의 육체를 소유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 시작이다. 
페미니즘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이슈가 있다. 
하나는 경제적 자립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계산서를 지불할 수 없다면,
당신에게 자유는 없다. 
두 번째 이슈는 당신의 육체는 바로 당신 것이라는 점이다. 
단지 섹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도 마찬가지다. 

내가 몇 명의 자녀들을 가질 수 있는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새벽 5시에 일어나 가족들을 위해 서빙을 시작할 것인지도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다른 남성들에게 보기 좋으라고 내 가슴에 실리콘을 집어넣어 부풀리지 않을 것이다.”


육아에도 핏(fit)이 있다고 한다. 

엄마와 아이가 각자 맞는 부분, 가장 행복한 부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엄마 노릇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대의 모성은 엄청나게 많은 부분에서 지나친 기준에 의해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 

여성들은 집에서의 무급 돌봄 노동과 가족 생계를 분담하는 일까지 이중부담을 지게 됐다. 


여기서 공자의 이 말씀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활쏘기가 과녁 뚫기가 아니라 과녁 맞추기인 것은 사람마다 힘이 같은 체급[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래의 도道다.”

 논어 3-16 子曰;射不主皮,爲力不同科,古之道也.(자왈, 사부주피 위력부동과. 고지도야) 

   . 

도道는 양量이 아니라 ‘이치에 맞느냐 틀리느냐’라는 질質, 즉 논리의 문제이다. 

양을 아무리 늘려도 질이 되지 않는다. 

도리道理나 논리論理나 다 이런 질質을 말한다. 

그 다음 과녁을 얼마나 깊이 뚫었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니 정곡을 찌르기만 하면 깊든 얕든 다 좋은 것이다. ‘사람마다 각기 다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이 도의道義이다. 

그러나 경쟁사회는 거꾸로 한다. 

화살이 어디에 맞는지 괘념치 않는다.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딸딸하니까 시비는 가리지 않고[도리를 모르고] 

다만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사정없이 깊이 뚫으라고 강요한다[도의를 모른다]. 


엄마노릇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엄마도 게으를 권리가 있다. 

결국 남편과 가사 분업을 통해 

원하는 과녁 맞추기(아이를 잘 키워내기)를 하면 되는 것이지

얼마나 세게 뚫어버리느냐는 아무 상관없다. 

'60점짜리 엄마', '대충 엄마', '보통 엄마론'이 나오는 이유다. 


만약 육아의 핏이 맞는 분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자기신체결정권자인 엄마로서 살 수 있다면

나는 훨씬 더 행복할 거 같다. 

언젠가부터 워킹맘들 사이에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돈으로 하자'는 논리가 지배했다. 

로봇청소기, 디쉬 워셔, 빨래 건조기, 그리고 시간과 노력을 절약해주는 샐러드마스터 주방도구 등. 

살 수 있는 것은 비싸더라도 모두 사서 스트레스받지 말고 일하자는 거였다. 

늘 남편과 싸우곤 하는 '아주머니를 일주일에 몇 번 불러 도움을 받을 것인가'의 문제도 여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돈을 쓴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루스 코완은 기술과 혁신은 엄마에게 더 많은 과업을 부과했다고 설명한다. 


미국 여성 평균 가사노동 시간을 분석한 루스 코완의 책 
세탁기와 냉장고와 같은 가사 기술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1860~1960년 사이 미국의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줄지 않았다는 루스 코완의 연구는 
가사 기술의 해방적 기능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다. 

세탁기를 사용하여 빨래를 하는 것이 손으로 빨래판을 이용하여 빨래를 하는 일보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의 절감을 가져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코완은 가사 기술이 널리 보급되는 과정에서 함께 일어난 몇 가지 변화가 
평균 가사노동 시간을 일정하게 묶어두었다고 지적한다. 

우선 세탁기와 같은 가사 보조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실질적으로 큰 힘이 드는 가사노동은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 혼자 빨기 어려운 큰 이불 같은 것은 남편이 거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사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힘든 일들이 이제는 여성 혼자 할 만한 일이 되었고, 
남편들은 더 이상 가사노동에 힘을 보태지 않게 된다. 

또한 세탁기의 등장은 가족 구성원의 ‘기대 수준’을 높여서 결국 자주 빨래를 하게 했다. 
빨래하기가 무척 힘든 일이었던 시절에는 
웬만큼 더러워도 대강 참고 지냈던 가족들이 
이제는 새하얀 셔츠와 깨끗한 속옷을 당연히 하게 되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출처: 한겨레 [기술 속사상] 세탁기가 ‘남편 해방’ 시켰다?/이상욱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32694.html



#2.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한다

(원제 ‘The Monster Within: The Hidden Side of Motherhood)


양가감정에 관한 두 번째 책의 저자 바바라 아몬드(Barbara Almond)는 정신분석ㆍ상담 의사다.

책에서 그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 희생…, 뭉뚱그려 ‘모성(Motherhood)’은 무조건 완벽하고 최고여야 한다는 아득한 기준을 부정했다. 끊임없이 ‘모범 어머니’를 찾아 전시하는 사회, 

모든 어머니들도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채찍질하는 사회를 비판했다. 

책의 제목처럼, 모성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나란히 있고 

모든 어머니는 자식을 진심으로 미워할 때도 있다고 썼다.

‘당신’만 아이를 미워하는 게 아니고, 

그게 잘못된 일도 아니고, 

한결같이 감싸주는 게 아이에게 좋은 일도 아니라고, 

그러니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라고 썼다.





나는 결혼 전부터 나중에 아기를 세 명은 꼭 낳고 싶었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나 자신이 언니 두 명과 함께 살기도 했고, 살아보니 세 명의 자식이 이상적이란 생각을 늘 하고 자랐다. 

둘이 싸울 때 셋이면 중재자가 생긴다니. 3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 같았다. 


나는 우리 엄마의 속을 제일 많이 썩이는 주범이었으면서도 

엄마가 힘드실 것이란 생각보다는 소소하게 재밌고 행복하실 것이란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엄마가 되면서도 그 의미가 무엇일 것이란 생각은 못했다. 

그저 이승기 노래 '결혼해줄래'처럼 "나 닮은 아이 하나 너 닮은 아이 하나 낳고(남편 닮은 아들 하나, 나 닮은 딸 하나)"는 꼭 낳고 싶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아이를 출산하고픈 욕구는 ‘불멸성’에 대한 욕구라고 했다. 

맞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이라고 부르면서 남의 혼에서 지혜를 산출해내는 것을 돕는 역할을 자처했다. 

늘 뭔가를 지독하게 생산하고팠던 나는 불멸성을 추구했나보다. 

혼에서 지혜를 늘 내고 싶었던 나였는데, 그걸 어떻게 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나는 일단 진짜 아기를 낳는 방법은 알 것 같았다. 

지혜를 못 낳을 바에야 아이라도 먼저 낳자는 심산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지혜라고 못 낳으라는 배포도 생겼고, 아니 그보단 지혜가 별거인가,

 내가 '아이 낳아보자고 생각 잘 한 게 지혜지'라는 근자감도 생겼다.


‘규모의 경제’도 생각했다. 하나 들어가는 데 필요한 육아용품이니 뭐니, 

결국 키우는데 필요한 진입 비용이 비슷하다면 

삶의 기쁨을 주는 아이들을 더 많이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물론 아이가 커가면서 각자의 것을 사줘야 할 때는, 꼭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EBS ‘공부의 배신’이라는 다큐가 엄마들 사이에 유행이었다. 

“공부는 절대 배신하지 않아 “라고 했는데, 지독한 경쟁사회에선 공부가 배신한다는 거다. 

그러나 사실 공부가 배신해서 명문대 못가는 건 부차적인 문제다. 

요즘은 명문대가 배신한다. 

명문대 학생이나 비명문대학생이나 졸업 후 보장되는 게 없어서 백수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이제는 학벌의 평준화 즉 명문대의 배신이란 말이 나와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배신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나보다 먼저 산 여성 선배들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은 애를 낳은 것”이라는 

뿌듯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이 꼭 ‘자식농사’를 잘 지어서도 아니다. 

세속적 기준의 결과에 관계없이 그들의 발언은

내게 ‘아이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가르쳐줬다.



재미작가 이민진은 2009년 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출산 이유는 사교육비 부담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바로 '가족'에 대한 우리의 양가감정이다. 
기쁨과 보람이 있는가 하면, 희생에 대한 억울함과 보답에 대한 부담이 엇갈리는 것 아닐까.

우리가 어떤 물건이 너무 비싸다고 말하는 것은 그 물건이 과도하게 평가되어 있으며,
투자에 대한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 물건의 가치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왜 롤렉스 시계를 사는지, 또 왜 샤넬 정장을 사는지 물어보라.
아니면, 5000원이면 충분히 한 끼 배를 채울 수 있는데
왜 1인분에 10만 원짜리 정식을 먹는지 물어보라.

사람들은 가슴속에서, 마음속에서 가치를 동의할 때 물건값을 치른다.
아이들 키우는 비용이 언제부터 고가의 가격표를 단 무거운 짐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과잉 비용으로 생각되기 시작했을까?

자녀 교육을 위해서 쓰는 돈과 아이의 성공이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교육비는 아이의 공부를 돕기 위한 것인 한편, 분명히 부모의 걱정을 덜기 위해 별도로 쓰이는 비용이다. 우리는 그 비용이 값을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이들이 공부를 거부하거나, 시험에 떨어지거나,
부모 친구들이 별로 쳐주지도 않는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 언제나 일어난다.
그땐 부모의 투자가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그땐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 끔찍하게 실망하고 부모의 과잉 기대에 분노하지 않을까?
출산율이 왜 그리 낮은지, 내 추측은 이렇다.
오늘날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 자녀는 서로에게 만족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가족 규모에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닐까?”


당시 아이를 낳고 1년이 되지 않았던 나는 분명 이 의견에 저항했다. 

흥, 나는 만족해

나는 내 선택이 달라질 수 있었다고 믿지 않아. 


그런데 7년이 지난 지금? 솔직히 흔들린다. 

아이가 무슨 선행학습 후 치른 경시대회도 아니고, 

학교 현행 정규과정에서 하는 받아쓰기, 수학 단원평가에서 

기대와는 엄청나게 차이나는 점수를 받아올 때 

이게 ‘자녀에 대한 불만족’이란 무시무시한 신호탄이구나 하고 경악한다. 

그러나 내가 사실해준 것도 없지 않나. 투자가 없으니 수포도 아니다.


남들이 어떻게 셋을 낳았냐고 물으면 

나는 내가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아이를 낳고는 늦게 끝난다는 직업의 핑계를 대고 

입주 이모님의 손을 많이 빌렸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별로 기대할 수 없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택했던 결정이었다. 

CCTV도 들여놓지 않고 

“믿지 않으면 고용 말고, 고용했으면 믿어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래서인지 이모님과 사이도 좋았다. 한 5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내가 직접 키우는 시간이 적으니, 양육스트레스는 회사일에 비해 훨씬 적었다. 

오히려 회사 스트레스를 집안에서 아이들에게 위안받는 날들이 더 많았다. 

이모님이라는 범퍼가 있었으니까.


어느 날부터 아이들이 이모를 너무 좋아하면서 질투가 났다. 

내게 엄마라고 부르는 꼬물락거리는 것에게 원하는 요리를 척척 해주고 

늘 손을 잡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주고, 

장을 보러왔다갔다 유모차를 밀어주는 우아한 엄마 역할을 뺏긴 것 같았다. 

저 기쁨을 내가 독차지하고 싶어졌다.


문제는 그 이후에 시작됐다. 

회사를 그만두고 셋째부터는 내가 키워보겠다고 하고서다. 

나는 ‘독박육아’를 내가 자처해서 시작했지만, 정말 폭탄을 맞은 듯 힘들었다. 

엄마되기라는 것은 왠지 엄청난 초인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나는 좀 마음이 편한 성격이라 대충 되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아이에게 화를 내는 횟수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아이에게 불만족이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불만족이다.


‘엄마학교’의 서형숙 교장선생님은 내게 

“명품을 얻으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많은 비용을 기꺼이 감수해서라도 그것을 얻으려고 한다. 

그런데 하필 아이는 이미 명품인데, 왜 그런 비용을 감수하려 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이가 엄마를 힘들게 하면 

“엄청난 비용을 요구하는 거 보니 과연 엄청 명품이로구나”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했다.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고 드물다(<에티카> 5부 마지막 구절)”고. 

이 말만큼 육아에 어울리는 것도 없다. 


아이를 잘 키워내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드문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고귀하다. 

'아이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아마 

그 힘들고 드문 것을 이해한 엄마들의 고백이 아니었을까. 

나는 매 순간 그 고백을 하면서 살고 싶다. 

그게 내가 정의하는 ‘마더링’이다.


그래서 요즘 뜨는 공유경제가 반갑다. 

더 이상 소유하지 말고 나누자(Don’t own. Share)의 정신이다. 

이로 인해 ‘가성비(가격대비성능)’를 따지는 세상이 됐다. 

거품을 빼자는 것이다. 


아이가 명품임이 분명하다면,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도 분명한데 

그럼 아이를 키우는데 들어가는 수고와 비용도 가성비를 따져야 하지 않을까. 

필요 없는 허영에 근거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비용과 수고는 빼자. 

그게 소크라테스가 의미했던 지혜일 터인데, 그 지혜는 혼자서는 구하기 힘들다. 


아이를 산출하는 데도 엄마, 아빠가 공동으로 필요했듯이, 

아이를 잘 키우는 지혜도 엄마 혼자서는 힘들다. 

옆에서 지혜를 산출해줄 산파도 필요하다. 


엄마들의 팟캐스트가 필요한 이유다. 

이제 육아의 가성비를 따질 때가 됐다. 

필요 없는 지출, 배신하는 비용은 청산하자. 

생각을 바꾸면 힘들지만 배신하지 않는 육아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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