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냐 프레시하냐, 그것이 문제로다.
“개, 돼지”
분명 올해 한국사회를 강타한 키워드다.
영화 <내부자들>에 나오는 세 개의 씬
(청와대 민정수석과 검찰 부장검사의 특수관계, 별장 성접대 동영상, 개돼지 발언)
이 진짜 현실에 존재했다는 점은 우리를 경악시키기 충분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53476.html
그런 의미에서 추석날 19금에도 불구하고 공중파에서 방영된
‘내부자들:디 오리지날’을 다시 챙겨봤다.
디 오리지날을 처음 봤는데 조국일보의 편집회의 등
캐릭터의 인과관계가 선명히 드러나서 더 좋았다.
다시 보기를 통해 깨달은 점은
내부자들의 키워드는 뭐니뭐니해도 개와 똥이라는 거다.
정확히 세어보지 않았지만
빈도상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일단어일지도 모른다.
합쳐서 말하면 ‘개똥’이다.
(좀 거친 단어들이 계속 등장하지만 영화의 대사들이니 양해바란다.)
개는 그 충직성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는 인간성과 대비되는 동물 즉 금수(禽獸)를 대표한다.
나는 어쩌면 조국일보의 이강희가 욕했던 ‘SNS’의 키보드워리어족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개처럼 적당히 짖다가 알아서 조용해지고”
또는 “오징어처럼 안주거리로 씹다가 제풀에 지치고 살기 바쁘면 뱉어버리는”
민중이 되지 않으려고 글을 써보려고 한다.
먼저 <내부자들>에 나오는 등장동물은
:오징어, 개, 돼지, 여우, 곰, 지렁이다.
그들이 하는 행위는
:똥싸다. 똥치우다. 똥닦다. 똥구멍 빨다. 물다. 놓다. 짖다. 빨다. 따라오다.
모든 게 개 상징이다. (이하 “ ” 표시는 모두 내부자들의 대사를 인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끌고가는 세 주인공은 개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우장훈은 대검 중수부란 엘리트 코스를 가려고 부장검사 밑에서 출세를 위해
“개처럼 물라면 물고 놓으라면 놓으며” “까라면 까고 덮으라면 덮으며” 산다.
그러나 첫 장면에서 미래자동차 재무부장의 비자금 파일을 안상구에게 놓친 것처럼
늘 “놓치면 똥 되는 걸” 알면서도 “죽 쒀서 개 준다”.ᅠ
결정적 순간에 실패하거나 배신당한다.
자기 자신이 개처럼 살아왔다고 자임하니
개한테 주는 것도 어찌보면 억울하지 않을 터다.
우장훈이 부장검사의 명령을 거부하고 백의종군하며
언론, 정치, 재벌의 유착관계를 수사할 때
그때야말로 그는 개같은 삶을 벗어난다.
그는 무서워서 발을 빼는 자기 수사관에게 썩은 동아줄 같은 단서라도 물어오라면서
“계장님, 시골에 처박혀서 개똥 치우기 싫으면”이라고 협박한다.
“남의 똥구멍이나 닦는” 이강희가 ‘너와 나는 어차피 같이 권력 좇는 신세’라고 할 때
“나는 너같이 더럽지는 않아”라고 말할 수 있는 기개가 살아나는 순간이다.
안상구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 막후 주먹으로 활동하며 개처럼 살아왔다.
머리가 좋고 힘도 센 그는 개로 살던 어느날
“주인 밥그릇을 노리고 지랄을 한다.”
여기까지는 “여우 같은 곰” 노릇이다.
그가 여우짓을 하려는 순간 철퇴가 날아온다.
“청소시켰으면 청소만 하면 되지 쓰레기까지 훔치려고 한” 죄로
그는 오른손을 잃는다.
그래서 이강희는 안상구에게 말한다.
“상구야, 짖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어려보이는데, 그만큼 똘똘했던” 깡패는
“주먹 쓰는 친구가 똘똘하기까지 하면 사고 치는 거 아냐?”했던
이강희의 예언대로 사고 친다.
개노릇을 그만하려는 것이다.
그는 데칼코마니처럼 자기가 당한 모든 것을 돌려준다.
그는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에 충실하다.
정의를 외치는 우장훈에게
“정의? 대한민국에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있기나 한가”
그는 복수를 원한다.
오른팔을 자른 이강희를 찾아가
“이젠 글같은 거 쓰지 말고”
라며 똑같이 오른팔을 잘라버린다.
비자금파일을 넘기지 않으면 감방에서 콩밥먹으며 평생 썩게 될 거라고 협박하는 우장훈,
그를 믿게 되고 손을 잡으면서 복수의 복선을 짠다.
우장훈은 족보도 없이 한 건 수사를 통해 권력을 잡아보려 애쓰지만
성폭행에 청부살인을 일삼는 깡패새끼와 놀아나는 스폰서 검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며
현실 앞에 굴복하기에 이른다.
원래 시나리오대로 우장훈이 수사에 안상구를 이용하길 실패하자
이번엔 안상구가 복수에 우장훈을 이용하게 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안상구)
“나보고 내부자가 되란 얘기야.”(우장훈)
“시골에 처박혀서 평생 굶든가. 내부자가 되든가. 원하는 것이 뭔지 선택해”(안상구)
안상구의 학습력은 허를 찌른다.
그는 배운대로 되갚는다. 위트있게.
마지막 데칼코마니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이걸 폭로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한다.
“복수 같은 달달한 것은 너무 낭만적이라고 할까. 난 정의를 원합니다.”
‘달달’이란 형용사는 이제 정의에서 복수로 옮겨갔다.
아니 정확히 이제 그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에 더 충실하다.
더 이상 개가 아니다.
내부자들의 전형적인 언,정,재 유착 상황을 다시 정리해보자.
오현수 미래자동차 회장은 장필우 국회의원(대선후보)에게 비정규직 법안 저지를 신세지고 있다.
장필우는 그걸 ‘너덜너덜(넝마)’로 만들겠노라 장담한다.
장필우는 미래자동차로부터 비자금 300억을 신세졌는데,
그것도 모자라 “잡상인”(박종팔)의 후원까지 받는다.
“한강물을 떠다 장사할 수는” 없기 때문.
오현수는 이강희에게 정무적 판단을 조언받으며
정치판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짜는 대가로
조국일보 핵심 광고주가 되는 마케팅 딜을 한다.
‘거대언론사의 논설주간’이란 족보를 가진 이강희는
“어차피 인생의 주인공으로 정해져 있는” 장필우 정국에서
총리나 장관을 노리며 “똥이나 닦아주며” 살고 있는데
막상 “족보도 없는 새끼” 우장훈도 그 누구의 똥구멍을 쳐다보지 않는데 비하면
많이 “더럽다”.
그의 말처럼
“어차피 인생은 독구다이(單獨)”라는데
그의 인생인맥이 넝마처럼 얽혀있는 걸 왜일까.
영화의 첫장면 장필우의 대선 후보 라이벌 김석우가 이강희와 밥을 먹는 장면.
이강희에겐 김석우가 음식물 낀 치실을 보여주며
“이런 실하나 걸쳐주십사”할 때의 그 역겨운 실이 덕지덕지 이어져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개를 많이 발언하는 건 이강희인데
그때마다 비웃는 듯한 실실웃음이 소름이 끼치는데
그 웃음은 사실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
아니 “매우 겨냥하고 있어보인다.”
안상구는 박종팔의 배신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일분 전
우장훈의 도움으로 조 상무의 강타를 피해 살아남아
한 모텔에 이르는데
그 모텔에서 똥누다 나와 소위 스쿼트 자세로
“소주 하나, 프레쉬로”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fresh한 똥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줬다고나 할까.
똥이 더러운 건 아니다. 똥누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야말로 똥이 고맙다. 비워주니 또 들어간다.
몸이 작은 아가들은 그래서 꼭 먹으면서 똥을 눈다.
변비는 만병의 근원이라서,
요즘엔 대장을 살릴 수 있는 온갖 비타민 중 대표적으로
유산균 프로바이오틱스가 대유행이다.
대장이 튼튼하면 기초체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연분만을 하면 양수를 통해 유산균을 받고 태어날 수가 있다며
똥 이식(移植)법까지도 처방되는 마당이다.
똥 잘 누고 똥을 잘 치우는데
전국민적 관심이 쏟아지는 셈이다.
그러나 “권력욕, 명예욕, 성욕”으로 점철된 욕망이
불로장생초처럼 사람을 젊게 만든다는 착각 속에서
누군가의 욕망을 짓밟으며 눈 똥은 구리다.
영화에서 이강희는 철학자 리히텐베르크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욕망이 적을 수록 행복해질 거라는 것은 대단한 개소리다.
권력을 잡아보지 않고 하는 자들의 개소리다."
그들의 똥은 구리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그걸 치우는 건 더 고역이다.
“구린놈은 아무리 씻어도 구린내가 가시질 않는다.”(우장훈)
진짜 개똥은 권정생의 ‘강아지똥’이다.
권정생 작가의 <강아지똥>이 있다.
추운 겨울 아침에 흰둥이가 누고 간 강아지똥은 이미 남들은 버려진 존재라고 업신여기는 오물덩이 속에서 살아 있는 생명의 온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를 보면 권정생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어른들도 읽게 된 것은 아마 한국인이면 누구나 체험한 고난을 주제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한 권의 도덕 교과서를 보는 것보다, 푸른 하늘과 별과 그리고 나무와 숲과 들꽃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 인간만이 아니다. 한 포기의 꽃과 풀도 끊임없이 시달리며 살고 있다. 공존은 성스럽다. 이웃 사랑은 남의 것을 빼앗지만 않으면 된다.”
아래는 권정생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말해준다.
권정생 작가는 지병으로 지쳐 있을 때, 처마 밑에 버려진 강아지똥이 비를 맞아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땅속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보게 됐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 강아지똥이 스며 녹아내린 바로 그 자리에 놀랍게도, 앙증맞은 민들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권정생 작가는 순간 ‘아, 저거다!’하면서 ‘강아지똥과 같이 보잘것없는 것도, 남들에게 천대만 받는 저런 것도, 자신의 온몸을 녹여 한 생명을 피워내는구나.’라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며칠 밤을 새워 강아지똥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림을 그린 정승각 작가는 강아지가 똥 누는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강아지 뒤를 4개월 동안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 후 강아지똥의 모형을 찰흙으로 뜬 뒤 밑그림을 그리는데 2개월, 그러고도 다시 몇 달씩 바라보다 마침내 강아지똥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받고 나서야 붓을 잡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림책 《강아지똥》은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긴,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의 이야기로 태어났습니다.
개똥을 욕한다는 건
개똥을 외부자로 밀어낸다는 건
공존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대신 그가 개똥을 보지 않으려면 그 어느 순간까지 그는 누군가의 개똥으로 살아야 한다.
영어에 brown-noser라는 표현이 있다. 남의 똥구멍을 핥다가 코가 그만 똥색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ass kisser라고도 하고 bootlicker 또는 sucking-up, 가장 무난한 표현으로는 yes-man이다.
상사의 눈치를 맞춰가며 알랑대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이다.
특권의식을 지닌 사람들은
사실은 자기가 누가봐도 개똥으로 보인다는 걸
자기만 모른다.
사막에 목을 처박고 마치 숨었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나 보고 있는 타조처럼.
라캉은 이를 '시선과 응시의 균열'이라고 본다.
아동작가 최초로 100만부가 넘게 팔려 부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권정생 작가는 평생을 교회 종지기로 사셨다.
그는 구린 개똥이 아니라 fresh한 개똥을 누구보다 더욱 신선하게 살려내신 분이다.
<내부자들>은 분명 불편한 진실이었다. 다시 봐도 역시 그랬다.
최근 페친 분 중의 한 분의 프로필 사진에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진실은 태양과 같아. 잠시 가릴 수는 있지만 사라지진 않지"(엘비스 프레슬리)
그리스어로 진실은 aletheia다.
망각(lethe)의 강을 건너며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결심
그것이 알레테이아다.
<내부자들>에 나오는 등장동물인 개돼지의 '똥싸다. 똥치우다. 똥닦다.'는 배제된 99%가 아니라 자연이다.
자기는 자연이 아닌양 하는 눈먼 내부자들이 있을 뿐이다.
진리는 자기가 외면하지만 않으면
타조(눈먼 내부자들)처럼 코만 박고 외면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고 환한 대낮이다.
과연 나는 그 진실을 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추석날 놀러간 다른 집에서
저녁 10시에 흥분한 아이들이 잘리가 없다.
그러나 아이들을 억지로 눕혔다.
"19금이라 너희들 보고 나면 며칠 밤 동안 시달려. 너무 무서울 거야."
호환마마처럼 얘기하고선 겨우 재우고 본 영화.
내가 이 영화의 현실을 과연 19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19세 이상만 이런 현실을 겪는다면야 너희들은 안전하다만.
우리 집에서 나오는, 학교에서, 엄마 입에서 나오는 얘기들이
혹시 '내부자들'의 잔혹한 19금은 아닐지.
나는 그것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