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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진 WonjeanLee Sep 16. 2016

나쁜 엄마 신드롬

未有学养子而后嫁者也(미유학양자이후가자야)와 메데아(Μήδεια)



"엄마, 오늘은 왜 간식을 챙겨놓지 않았어. 나 배고픈데"


돌봄교실을 안 다니겠다고 선언한 지 삼일째, 초 2인 아이가 집에 와서 전화한다.

아이가 좋아할 간식을 챙겨서 칠판에

"잘 다녀왔니? 맛있게 먹고 있어. 엄마는 언제쯤 와. 사랑해"

라고 샤방샤방 적어놓고 나가리라 결심한지도 똑같이 삼일째다. 집을 비우지 못하셨지만 가끔 비우셔야 할 땐 늘 저렇게 해주셨던 우리 엄마처럼.



돌봄교실에서는 으레 오후간식을 먹고 오는 아이라

집에 오면 배가 많이 고픈 터다.

전화를 받을 때 난 밖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미안해, 엄마도 아침점심 못 챙겨먹었어.'

생각하며 바로 지하철을 탔다.

난 아이를 방치하는 걸까.

"자기 좋은 일 하겠다며 자기계발하느라 아이는 내팽겨치고"

나쁜 엄마 신드롬이라도 걸린 걸까.




#1. 엄마의 장소는 도처에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권력의 장소는 도처에 있지만 또한 어디에도 없다."


푸코의 말이자, 안토니오 네그리의 <제국>에 나오는 문장.

동양에서는 "도(道)가 도처에 있으나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곤 하는 그 역설적 어구다.

나는 말하고 싶다.

"엄마의 장소는 도처에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현대의 엄마들은 누가 뭐래도 독박이다.

실제로 나는 독박육아라는 말을 듣기에는

'아이키우기 협동조합'으로 따지면 가장 탁월하다 할 파트너 남편을 둔 입장이지만

이 용어가 우리 시대의 많은 엄마 노릇을 규정하고 있다고 본다.

'독박'은 과학적 모성, 투자자로서의 모성까지 요구받는

'모성의 자기계발' 시대에 나오는 아우성인 게 분명하다.

팟캐스트를 시작하면서 나같이 오로지 '독박'이 힘든 엄마들을 만났고

그 고백을 통해 나를 옥죄어 오는 죄책감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었다.  

'엄마 노릇'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걸까.



강풀의 '육아일기'의 한 컷


신간 <엄마도 아프다>를 감동적으로 본 이유다.


"출생부터 양육, 교육 노후 부양에 이르기까지 재생산의 전 영역을 가족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강제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도적으로 강제했다는 것은 출생부터 노후까지 이르는 한 사람의 재생산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그 개인이 속한 가족이 충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모성 실천을 하는 엄마는 그 일이 얼마나 생산적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비싸게 팔리는 노동자'를 철저하게 길러내는 것으로 그 능력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투자자로서의 모성이 만들어내는 돌봄이 생산성의 차원으로까지 넓게 확장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
"가족은 그렇게 질문되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스며들어 있다. 가족과 가족이 행하는 수많은 실천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때로는 도덕의 이름으로 상식의 이름으로 전통의 이름으로 가장 분명히는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가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 구조 안에 가족이 수행하는 역할이 지나치고 그 역할 대부분은 엄마, 즉 여성 1인이 감당하고 있는 것에서 엄마의 괴로움은 커져만 간다. "


지금 내가 '비싸게 팔리는 노동자'를 철저하게 길러내서 엄마로서의 생산성을 증명하기 위해

매일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문제집 풀리기인데, 그것마저 내가 피곤하면 잘 안되고

무엇보다 그 일이 기껏해야 타깃으로 하는 것은 수행평가 단원평가 대비라는 데서 강한 동기부여가 안된다.

(물론 일각에선 '기껏해야'를 그런데 쓸 수 있냐고 반문할 것이지만)



#2. 스펙이 귀납이라면 '뒹굴뒹굴'은 연역



스펙이어야 할까 싱귤러리티여야 할까


스펙 세대.

스펙(specification)으로 무장한 비싼 아이로 키우는 게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은

내가 몸으로 증명할 수 있다.

난 집안 막내로 비싼 사교육을 받고 자랐다.

새벽 2시까지 대치동 인근에서 학원 뺑뺑이를 돌았다.

내가 받은 사교육 값을 해내야 할 것 같아서

내 스펙을 다 써먹어야 한다는 필요 이상의 압박감을 느끼며

대학 시절에는 무서운 기세로 과외를 해서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그 마음의 빚을 갚고자 했다.

그 이후에는 끊임없이 "내가 무엇이 되는 게" 그 스펙대로 사는 줄 알았다.

소위 상위 1%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알았어야 했다.

specific할 게 아니라 singular해야했다고

specific이 남들은 나쁘고(개돼지) 나는 좋다(1%)란 함축을 담고 있다면

singular는 남들과 내가 다 다르면서 누구나 좋은 것이다.



한 개인 안에 특별한(specific) 포스트잇을 계속해서 붙여주는 게 귀납이라면

한 개인이 그 자체로 얼마나 특별한지(singular)를 계속해서 일깨워주는 게 연역이다.

내가 증명하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은

나의 싱귤라리티(singularity)였지 스펙(specification)이 아니었다.

스펙이 쌓여서 증명되는 귀납이 과학이라면

존재의 싱귤라리티(특이성)가 스스로 증명(자명)하고 있는 것도 과학임이 분명하다.


군자불기(君子不器) :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공자는 그래서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고 했다.

뭔가를 채워담아야만 증명되는 귀납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돌봄교실 얘기가 나왔으니

돌봄교실이 생겼을 때 나는 보도자료를 썼다.

노무현 정부(2004)때 돌봄교실과 방과 후 학교가 만들어졌다.

당시 "와, 나도 맞벌이니 애가 생기면 여기 맡기면 되겠구나"고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이명박 정부 때는 방과 후 학교가 사교육 대책의 하나로 활성화됐다.

박근혜 정부에선 돌봄교실이 전학년으로 확대된다고 한다


이렇게 보육의 기능은 분명 강화되고 있다지만

막상 그 수혜자가 싫단다.

아이는 돌봄보다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없는 집에서 why책이라도 읽고 있는 게 낫단다.

학습만화책성애자인 아이는 늘 만화책에 코를 박고 있다.

나도 활자 성애가 있기 때문에 그걸 말리지 않는다.

모든 단편 정보가 얽히며 지식의 스파클이 일어 확장될 날을 기다린다.

그래서 돌봄에서 억지로 스케줄에 따라가기보다

엄마 없는 집에서 활자와 데이트하는 게 낫겠단 생각도 들었다.

다만 간식은 좀 챙겨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그러나, 언젠가는 간식도 혼자 챙겨 먹어야겠지. ㅎㅎ



스펙으로 무장하고팠던 나는

한때 자기계발서를 무지 읽었는데,

자기계발은 되지 않고 쳇바퀴만 돌았다.

"너는 맨날 진도가 안나가."

남편은 늘 구박한다.

"늘 피곤하고. 늘 같은 고민"

그런가. 난 언제나 이 고민을 극복할까.

하지만 고민조차 해보지 않으면 진짜로 넘어가지 않을 거다.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은 이것을 인정하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계발(self-help)이 지시하는 것은 사회 체계에 적극적으로 복속하라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통해 불안을 잠재우고 안정을 확보해 자발적으로 노예를 만든다.  하지만 불안의 안내를 따라간다면 자기 내면과 우리 사회를 통찰하게 된다. 불안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직면하는 문제와 사회적으로 씨름하는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주체가 불안을 경험한다는 것은 주체의 안녕을 막는 무엇이기보다는, 오히려 주체가 개인의 특징인 결여 및 사회의 특징인 적대와 특정한 방식으로 씨름하는 징후로 간주해야 한다."



#3. 엄마의 불안을 직면하자. 나도 크고 있으니깐.



엄마도 처음이다.

그래서 아이가 나를 키운다.

강풀의 육아일기가 있다.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4853818&memberNo=4257741


강풀은 育兒일기를 育我일기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키우고 너도 키운다.

엄마도 아빠도 다 처음이다.

그래서 <대학>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康诰曰 如保赤子 心诚求之 虽不中不远矣 未有学养子而后嫁者也
(강고왈 여보적자 심성구지 수불중불원의 미유학양자이후가자야)

<강고>에 “갓난아이를 돌보듯하여라”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나 진심으로 지극히 하면 비록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 목표와 그다지 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자식 기르는 방법을 배운 후에 시집가는 사람은 없다.


엄마의 불안은 당연하다.

자식을 길러본 후에 '알았다'며 시집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진심으로 구하면 된다.

누구나 모성불안에 사로잡힌다.

그리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아>(Μήδεια)에서 나오는 여인 메데아는 그 불안한 엄마의 전형이다.

그의 조강지처로 살아온 남편 아이손의 배신에 복수하기 위해 두 아들을 스스로 죽이는 비정한 엄마다.  


<들라크루아의 메데아>


<마리아칼라스가 1969년에 연기한 메데아>



그러나 비극은 보고서 똑같이 살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메데아는 그녀의 고통을 성찰로 바꾸어야 했던 게 아닐까.

아이들을 죽이는 비극으로 끝난 것으로 보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왕 라이오스가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아들 오이디푸스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현대 '독박육아'를 하는 엄마의 불안과 우울 그리고 고통은

메데아와 다르지 않다.

메데아는 사랑(남편 아이손) 때문에 조국과 부모를 배신하고

도망가려고 남동생을 토막내 죽이고

남편이 자기를 배신해 새 여자한테 가면

그 여인과 여인의 아버지까지 죽여가면서까지

여태껏 지켜온 자기의 사랑(정확히 사랑이라는 착각)을

수호하기 위해 결국 아이들까지 죽여야 했다.


나를 메데아로 놓고 보자면

결혼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기 위해

나의 자존감을 배신하고 스펙에 몰두하고

막상 결혼해서 엄마가 됐더니

엄마 노릇에 대한 어떤 경제적 사회적 보상도 해주지 않는 사회에 분노하며

그러면서도 아이를 죽어라고 '비싼 노동력'이 되도록 키워냈지만

아이가 그 스펙을 쌓아 좋은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데 실패하는 순간

그렇게까지 살인을 일삼으며 지켜온 나의 사랑(정확히 사랑이라는 착각)을 수호하기 위해

결국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절규하지 않을까.


메데아는 멈췄어야 한다.

그래서 나도 멈추려고 한다.

뒹굴뒹굴.

처음부터 아이 키우는 법을 배운 후에 시집오지 않았으니까.

"엄마는 도처에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한 엄마로 살아가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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