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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하이 SG Nov 16. 2022

[주인장 수다] 구독자 100명 기념 Q & A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기

구독자 100명을 달성했습니다.



아무도 관심 없지만 자축으로 글을 남겨봅니다.


그리고 아무도 제게 궁금한 사항이 없지만 이 또한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도 남겨 봅니다.


참 유일한 한 가지 질문이 있었네요. 그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질문은 아닌 줄 뻔히 아는 댓글들에도 질문이 궁하니 제가 다시 답글을 달아봅니다. 




1. 타국 생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과 그것을 극복하신 방법이 궁금합니다.

  

  => 타국 생활할 때, 가장 힘들었던 건 두 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아플 때와 외로울 때, 

전 你好 만 하고 중국에 왔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했고, 아내를 만난 후 중국어 학원을 1년을 다니긴 했습니다. 중국에 오니 你好 말고는 제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듣더라고요. 그래서 손짓 발짓으로 또한 전자사전을 옆에 끼고 회사 동료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사무실 10명, 생산직원 50명이었습니다. 조선족 직원이 한 명 있었는데 엄연히 본인의 일이 있었고, 법인장님만 통역을 해주었고요. 제가 가끔 부탁하면 틱틱거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일이야 뭐 손짓 발짓으로 그럭저럭 했는데 아프니 짜증 나고 답답하더군요. 한국에 당장 가고 싶었습니다. 거기다가 장염 => 신장결석 => 다시 장염 이렇게 오진을 하며 치료는 하지 않고 중국에선 그렇게 검사만 죽어라 합니다. 식은땀 흘리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걱정하실까 엄마에게도 말씀드리지 못했고, 일주일 아프고 나았고 다시 그렇게 그냥 살고 있습니다.


외로움,

외롭습니다. 문화가 다른 건 재미가 있기도 힘들기도 하니 이건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장인어른, 장모님은 남입니다. 나도 부모님으로 대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일 텐데 그럼에도 내가 한건 생각하지 않고 서운했고요. 딸이 야근을 하면 건강 걱정을 하지만 사위가 야근을 하고 새벽에 들어오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야근이 많았거든요. 아~ 우리 엄마라면 내 건강 걱정을 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솔직하신 분들이라 편하기도 합니다. 비록 나를 도와주진 않아도 딸과 손녀는 잘 도와줍니다. 그게 뭐 저를 도와주는 것이니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까지 아내와 대화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안될 때가 있다는 것이지 항상 그렇지는 않을 테고요. 

이건 제 입장이지 그분들 입장에서 보면 제가 가진 불만보다 많을터이니 이건 쌤쌤일 듯합니다.


어떻게 극복했는지...?

특별히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제 단점이자 장점이 기억력이 좋지 않습니다. 그냥 이 또한 지나가리라 ~ 그저 시간이 흘러 지나갔고 익숙해졌습니다. 운 좋게 그 이후로는 크게 아픈 적이 없었고, 주위 한국분들에게 물어물어 아플 때 가는 병원들을 찾기도 했고요. 외로움 문제는 여기서 친구, 지인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한국 출장 갈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다니기도 하면서 상해 거주 12년 후부터는 잘 지내고 있고요.


2.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 재미있다니 감사합니다. 6년 동안 블로그에 매일 끄적거리다 보니 글짓기 못쓴다고 방학도 싫어하던 제가 글쓰기가 취미가 되었네요. 취미가 되어 제 스스로 즐겁게 쓰다 보니 좋게 보아주는 사람들도 계신 듯합니다. 


3. 아내께서는 이 브런치 글의 존재를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 이 글의 존재를 모릅니다. 다만 첫 번째 글 '최악의 커플 상하이 여자 vs. 한국 남자'는 들켰습니다. 핸드폰을 내 컴퓨터에 들이대며 바이두 번역을 해보더니 조금 웃고 자기 방으로 가버렸습니다. 아내가 제게 그렇게 관심이 많지는 않아 그게 다입니다 T.T

다른 사이트에서 블로그 6년째 쓰고 있는데 그걸 알고 있음에도 제 글을 딱 6번 봤을 정도예요. 


4. 다음회도 기다릴게요~~


=> 다음회를 기다린다니 제겐 최고의 칭찬이네요. 감사합니다. 


5. 밤새워 읽고 오늘 밤 잠깐 졸다 반가워서 또 읽었네요~ 


=> 어이쿠~ 감사합니다. 눈 나빠졌다고 청구하셔도 책임 못 지니 오랫동안 눈 사용할 수 있도록 아껴 쓰세요.


6. 에세이 작가님 다되셨네요. 기획까지 다 직접 하시고 1호 팬입니다. ~ 


=>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누구신진 모르지만 밥 사고 싶습니다. 1 호팬 기념~~ 


7. 상하이 여자 vs. 한국 남자 10화가 끝이라 아쉽습니다. 얼른 11화 써주세요.


=> 속편은 아내의 관점으로 이미 시작을 해버려서요. 끝나고 나면 다시 11화 이어서 써보도록 할게요...  최소 10개 기준인데 10화에 해당하는 내용 제목을 아직 다 못 만들었거든요. 


8.(장모님과 싸우고 1년간 대화하지 않은 사연을 보고) 전형적인 한국인 성향대로 생활 이셔서 그런 듯 와이프가 외국인이면 그 나라의 부부문화 남편 역할과 문화를 먼저 배우고 익힌 뒤 생활하는데 맞다고 봄. 입장 바꿔보면 됨. 외국인 아내가 한국에 시집와서 한국 문화에 적응하려 노력 안 하고 자기 살아온 식으로만 생활하면 이혼 감.


=> 그래서 이혼당할 뻔했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9. 어제 남편이 제가 상하이 출신인 거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떤 분이 상하이 출신 아내에 대한 글을 썼는데 저인지 알았다고 ㅋㅋㅋ 궁금해서 네이버 검색으로 이렇게 영광스럽게 글을 읽게 되네요^^*

넌 먹지 마... 진짜 제가 한 말인 줄 ^^;;;;;;


=> 제가 다 영광입니다. 제 글이 부부 사이에 대화 소재가 되다니 말입니다. 행복하세요 ~~


10.(상하이 출신 아내 덕분에 대기업에 취직할 썰) 상하이 여성이랑 살고 있으니 회사에서도 참고 견디는 힘이 있을 거다.라고 이해했는데 맞는 거죠? ㅎ 상하이 여성들 궁금합니다.


=> 아내에게 진심으로 종종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넌 상해 여성 1300만 명 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함께 살 수 있는 여자야.라고 말입니다. 시끄럽고 집 임대 줄 때 조차도 자기들이 안 오면 남편이 계약했어도 무효이고, 대체적으로 일 잘하고, 능력 있고, 모든 의사결정을 자기들이 다 해야 하는 등 그렇습니다. 직원으로서는 상하이 남자보다 상하이 여성들을 더 선호합니다. 전 제 딸이 상하이 남자랑 결혼하는 거 절대 반대 안 하고요 ~. 아내가 상하이 여성이라 제가 덕 본건 한국 대기업에 취직한 것 하나는 있었네요 ~~ 


11. 중국인(외국인)과 연애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어떻게 극복했는지?


=> 아들이 상하이 여자 친구(?)가 있는 구독자 분이 계셔서 대신 질문해 봅니다.

확률상 여러 가지 이유로 연애하다 헤어질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연애의 어려움을 제가 여기서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장거리 국제연애 어려움만 적어봅니다.


제 경우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만나려면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비용

둘째는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 두 명 모두 직장인이라 둘 중 한 명이 희생하고 직장을 관두거나 타국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 


첫째, 연애 비용

음... 중산층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확하게는 중 중하 층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중하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조금 상하니 말입니다. 중산층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고요. 비행기 타고 놀러 간 건 돈을 모아 간 제주도가 유일했습니다. 그런 제가 연애를 하러 여자를 만나러 중국에 가다니요.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름 맘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보통 연애하면 얼마나 들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결혼을 하든 말든 말입니다. 그냥 대충 1,000만 원 정도 들지 않을까? 여유가 있는 분들은 더 많겠지만 당시 제겐 그 금액이 최대였던 듯 싶습니다. 그럼 당시 항공료가 40만 원 정도 되었고, 저렴한 호텔비와 식사 등으로 돈을 쓰면 한 100만 원. 한 달에 한번 100만 원을 쓰자. 그리고 1년 정도 만나다 보면 결혼을 하든 헤어지든 답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  현실적이죠. 다른 돈은 철저히 아꼈고요. 그때 친구들끼리 술자리는 거의 갖지 않았습니다. 회사 돈으로 먹는 회식만 참석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요. 참 그때 주말이나 평일 저녁 퇴근 후 할 수 있는 2~4만 원 주는 리서치 아르바이트도 조금 했었네요.


둘째,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나름 꼼꼼한 저였지만 그때는 너무 멀리 생각하지 말자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냥 감정이 가는 대로 놓아두자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씩 정리가 되더군요... 좋아하는 맘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 결혼식 먼저 하자고 했고, 상황이 되면 나중에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혼인신고 먼저 하고 결혼식 하고 그다음은 제가 썼던 브런치에 나왔듯 일자리를 찾게 되어 결국 함께 살게 되었고요. 내가 직장을 잡지 못했다면 아내가 한국으로 왔을 거예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긴 합니다. 결론적으로 지금이 나은 듯하네요. 누가 묻는다면 어차피 미래라는 건 100%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노력은 하되 내가 100% 결정하는 대로 되지 않으니 현재에 충실하면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12. 국제결혼의 장점 단점 그리고 딸아이가 국제결혼을 한다면...?


장점과 단점이 같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단점은 문화가 다르고 다른 점들이 많다는 것, 장점 또한 문화가 다르고 다른 점이 많아 살면서 계속 배울 거리들이 있다는 것.


장점이 하나 더 있네요. 

아이를 놓는다면 말입니다. 예전 귀족사회에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남매나 4촌끼리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문제가 많고요. 반대로 멀리 있는 사람끼리 결혼하면 자녀들이 두 사람보다 더 똑똑하거나 인물이 나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서양과 동양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가장 멀 테고요. 다른 국가라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경험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을 봐야 오픈 마인드가 될 확률이 높지 항상 같은 것들을 보면 그 속에 갇혀 버립니다. 기독교 문화에서만 자란 사람들은 기독교가 전부인 줄 알고 다른 종교 사람들과는 교류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나라에서만 있던 사람들이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기 쉽지 않고, 한 그룹에만 있는 사람들은 다른 그룹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례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국제결혼을 한다면 최소한 한 가지는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작은 경험이 아니더라고요. 한 번뿐인 인생 안 해본 것들을 하고 살아가는 걸 추천드리고, 그중 하나로 국제결혼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만 기회가 왔을 때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나에게 다른 경험을 못하게 하는 단체 혹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국가든 단체든 부모님이든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국제결혼 장단점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가 조금 많이 나아갔네요. 따라서 우리가 5년 후 여유가 된다면 딸아이가 유학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딸아이가 국제결혼을 한다고 하면 반대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물론 요즘 세상에 반대를 한다고 말을 들을 아이들도 아니지만요. 다만 저도 고정관념이 있는지라 몇 가지는 피하고 싶긴 합니다. 그건 좋지 않은 차별적인 생각이라 적지는 않겠습니다. 


13.15년 중국(상하이)에 살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출장으로는 2005년 11월 처음 상해에 왔고, 중국에 직장을 잡고 살러 온건 2007년 8월쯤 됩니다.

즉 남경에서 2년 좀 넘게 상해에서는 13년 총 15년 살았네요.


1) 남경에서 상해로 올 때, 

생산공장에서 일했고, 직위는 공장장이었으나 사실 관리팀장이라 보는 것이 맞을 듯하고요. 사무실 직원들은 내 나쁜 성격을 알아챘겠지만 생산현 장안에 있는 친구들은 내 나쁜 성격을 잘 몰랐을 듯합니다. 남자 생산직원들이 10명 여자 직원들이 40명, 2년 후 내가 퇴사할 때는 총 130명 정도 직원이 되었고요. 내가 남경에서 상하이로 간다고 했더니 白马王子(백마 왕자)가 간다고 했답니다. 저도 낯간지러웠는데 아내에게는 자랑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2) 구내식당 사장에게 죽인다고 협박을 당했던 일

처음 회사 정식 출근하기 전인 주말에 회사에 갔었고, 근처에서 농구도 하고 어울리기도 했던 중국 친구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회사가 거래하던 중국식당 사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일부러 접근했다는 것을요. 당시 인당 4위안에 점심을 제공하는 곳이었고, 6개월 후 밥이 맛이 없다며 직원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선이 되지 않자 직원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외부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무도 그 식당에 가지 않게 되었고, 그 식당 사장이 회사로 찾아왔습니다. 그때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추후 인사담당자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했습니다. 이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이제이 방식으로 말입니다. 중국인은 중국인이 상대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잘 해결은 되었으나 이 그지 같은 곳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첫 번째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안정이 된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니, 어느 나라를 가나 그런 것들이 있고, 좋은 분들이 있으니 나름 밸런스를 맞추게 되었고요. 

 

3) 6년 다닌 회사를 떠나고 난 뒤

회사를 떠나고 나면 그래도 한국사람들은 좀 연락을 하고 살 줄 알았습니다.

한국사람은 아무도 연락이 없는데 중국 동료들은 연락들을 주더군요. 개인적으로 환송회도 해주고 선물도 준비해주고 감동이었습니다. 뭐든지 이해관계가 끊어졌을 때 알게 됩니다. 그 뒤로 자주 그런 이야기들이 들리더군요. 오히려 중국 친구들이 더 정이 있고, 회사와의 인연이 끊어져도 지속 연락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주 자주는 아니지만 지금도 연락을 하고 삽니다. 남경에 있는 친구들도 상하이에 있는 중국 동료들도 말입니다.




아무도 묻지 않는데 혼자서 묻고 답하기 쉽지는 않네요~~ 

그럼에도 100명 구독자 자축하는 기분으로 끄적여 보았습니다. 



구독해주신 분, 좋아요 해주신 분, 댓글 주신 분들,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리고요~~ 행복하세요. 


p.s 다음 Q&A는 구독자 1,000명이 되면 할 건데요. 음... 한 3~10년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라도 괜찮다면 댓글에 질문을 주시면 모아 두었다가 그때 회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도 아무런 질문이 없다면 뭐 ~ 할 수 없죠. 오늘처럼 혼자 묻고 혼자 답하기로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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