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순간
1989년의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오후 서너 시쯤 집에 돌아왔다. 먼저 비발디의 <사계>를 들었다. 열흘 전이었나?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사계> 얘기를 어쩌다 꺼내게 되었다. 미화부장을 짝사랑하게 된 나는 수시로 그 애를 쳐다봤는데, 유독 그 애의 반응이 남달랐다. 그 곡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당장 집에 돌아와 엘피를 꺼내 <사계>를 들었다. 너무 좋았다. 지난 열흘 동안 매일 같이 들었고 그날도 들었다. <사계>를 듣고는 14인치 텔레비전 앞에 드러누웠다. 정규 방송 시작 전의 화면조정시간. 화면은 무지개색 컬러로 정지돼 있었지만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어떤 음악을 틀어줄까? 누워서 몸을 베베 꼬고 있는데 충격적일 정도로 환상적인 곡이 흘러나왔다. 가요도 아니고 팝송도 아니고 이건 뭐지? 그 곡은 엔야의 <Orinoco Flow>였다. 환상적인 곡의 여운을 안고서 강가로 나갔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능내리의 팔당호 풍경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아무도 없는 강가를 어슬렁거리며 이상우의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을 끝없이 흥얼거렸다. 그 애가 이곡을 좋아한다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나도 좋아했다. 그날따라 저녁 바람이 세차게 불어 정말로 옷깃이 바람에 날렸다. 해가 넘어가고 하늘이 잿빛이 될 즈음 집에 돌아왔다. 비발디와 엔야와 이상우를 듣고 불렀던 그날. 오후 서너 시쯤의 해와 여섯 시 쯤의 해를, 그 빛깔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음악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지만 음악 때문에 가장 들뜨고 설렜던 그때를 또렷이 기억한다. - 윤호준(음악평론가/음악취향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