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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예예 Dec 16. 2023

아빠취향탐구보고서

우리 아빠는 땅콩마니아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시던 아빠는 종종 역 앞 노점에서 간식거리를 사 오셨다. 아빠 손에 회사 가방 외에 검은 봉다리가 하나 더 있는 날이면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하고 잽싸게 인사를 하고 뽀뽀를 한 후 봉다리부터 받아 들었다. 잔뜩 기대하며 안을 열어보면 찹쌀 도너츠, 계란빵, 땅콩, 찐 옥수수, 과일 같은 간식거리가 들어 있었다. 검은 봉다리 안에 무엇이 있냐에 따라 입꼬리가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때 알았다. 아빠와 내 입맛 취향은 잘 맞지 않는다는 걸. 꽈배기면 좋으련만 찹쌀도너츠, 붕어빵이면 좋겠는데 계란빵, 그리고 군밤 대신 땅콩.


아빠는 본인을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먹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곤 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가 “전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습니다!”라고 어른들에게 말할 때면 입이 근질거리면서 아빠의 불호목록을 대신 줄줄이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 아빠는 해산물을 별로 안 좋아해요. 특히 생굴, 멍게, 해삼 같은 것은 먹을 수 없고요. 반드시 익혀야 하는데 그마저도 비려서 숨 참고 먹어요. 회는 초장 없으면 안 되고요, 초밥집 가서 엄마는 초밥 먹고 아빠는 나가사끼 짬뽕 먹어요. 건강빵을 좋아한다고 하시는데 사실 속에 팥이든 치즈든 크림이든 뭐 들어간걸 훨씬 잘 드세요!”


아쉽게도 실제로 말해 본 적은 없다. 말하는 상상만 여러 번 해봤을 뿐. 아무튼 내 생각에 아빠는 호불호가 꽤 뚜렷한 사람이었다. 다만 아빠가 한창 사회생활을 할 때는 예스맨이 환대받던 시절이라 아빠는 뭐든 괜찮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스스로 난 가리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된 것 같았다. 난 아빠의 취향을 알아주고 싶었다.


아빠의 간식 취향을 관찰해 본 바, 아빠가 최고로 애정하는 간식은 땅콩이었다. 저 정도면 땅콩 농장 아들로 태어났어야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빠는 땅콩 한 바구니면 행복해 보였다. 가을, 겨울이 되면 땅콩바구니가 곧 아빠의 동선이었다. 바구니가 식탁, 거실, TV앞, 서재로 옮겨 다니는 걸 보며 아빠의 움직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땅콩이 제철인 가을이 되면 집에 땅콩이 끊이지 않았다.  껍질이 있는 땅콩은 신선해서, 볶은 땅콩은 고소해서, 생땅콩은 쪄먹으면 맛있어서 사 왔다는 아빠의 말 뒤에는 ‘나는 땅콩을 정말 좋아해’라는 말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난 땅콩이 좋다고 말하면 되지, 꼭 엄마와 언니, 나 세 사람에게 아빠는 묻곤 했다. “땅콩 정말 맛있지 않니?(땅콩을 까서 건네며)


식당 반찬에 땅콩이 나오면 아빠 생각이 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빠의 땅콩 사랑 유전자는 딸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언니와 나에게 땅콩은 그저 심심풀이였기 때문이다. 땅콩보단 아몬드, 마카다미아, 호두 같은 견과류가 더 취향이었다. 하지만 어떤 유전자는 뒤늦게 깨어나는 걸까. 내겐 없다고 생각했던 아빠의 땅콩사랑 유전자는 내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활동을 시작했다.


이제 난 주변인들에게 땅콩버터를 추천하고 땅콩샌드를 좋아하는 땅콩 러버다. 사실 아직도 땅콩 그 자체는 막 좋아하지 않는다. 땅콩으로 만든 무언가를 좋아할 뿐. 하지만 제철음식은 본능적으로 당기는 걸까.(아니면 오랜 학습의 효과일까.) 땅콩이 제철인 가을이 되면 더 자주 땅콩버터가 땡긴다.

좋아하는 땅콩버터 조합 메뉴들!

창밖의 가을 단풍을 보며 식빵에 땅콩버터를 바르고 있으면 아빠 생각이 난다. 땅콩은 좋아하지만 땅콩버터는 싫어하는 우리 아빠. 오늘도 집안 곳곳을 옮겨 다닐 땅콩 바구니. 내게 있어 사랑은 취향을 기억하는 일 같다. 아빠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관찰하고 아는 것이 내 사랑의 시작이었다. 결혼 후 아빠와 떨어져 살고나서부터 늦가을 안부 전화에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아빠 요즘 땅콩 잘 챙겨드시고 계시죠?” 아빠의 답은 한결같다. “그럼~! 요즘이 철 아니냐, 잘 먹고 있지!” 나이가 들어가며 취향이 바뀌기도 하는데 아빠의 땅콩 사랑은 평생 갈 것 같다.


그리고 아빠, 나의 아빠 사랑도 영원히 변함없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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