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은 고구마보다 감자예요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쌀쌀한 날이면 찐 감자가 당기곤 한다. 특히 이렇게 따뜻하다가 혹은 더웠다가 비가 와서 추운 날이 그렇다. 난 이 증상을 ‘파리 감자 후유증’이라 부른다.
그곳은 파리였다. 프랑스 파리. 언니와 한 달간 유럽배낭여행을 떠났고, 신나게 이국적인 음식을 먹다 어느 날 지치고 말았다. 게다가 날은 어찌나 꾸물꾸물한지 흐렸다가 바람 불었다가 비 왔다가 그쳤다가… 우린 춥고 배고팠다. 여러모로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더 이상 달고 짜고 느끼한 건 먹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담백하고 따끈한 음식을 먹고 싶었다. 그렇게 우린 마트에서 과일과 감자 몇 알을 샀다.
감자를 고른 우리의 지론은 이랬다. 다른 과일이나 채소는 한국과 파리맛이 달라도 감자는 같지 않겠냐. 어차피 남아메리카에서 온 건데. 그리고 감자는 쌌다. 숙소에 도착해 공용부엌에서 냄비를 찾아 감자를 삶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통감자는 익는데 오래 걸린다는 걸. 언제 익냐며 이리저리 찔러대서 여기저기 포크 구멍이 낭자한 감자를 하나씩 들고 호호 불어가며 껍질을 살살 벗겼다. 이윽고 만난 첫 입! 아 내가 감자에게서 한국의 맛을 느낄 줄이야. 엄마가 밥 지을 때 같이 쪄서 넣어주던 감자는 그렇게 먹기 싫어했는데 처음 만난 파리 감자에게서 엄마밥맛이 났다. 고향의 맛이 감자가 될 줄이야.
“와 이거지! “ 내 극찬에 그 찐 감자도 어리둥절했을 거다.
그날 이후 내 취향관에서 감자의 위상이 달라졌다. 감자가 고구마를 제쳤다. 더 이상 고구마가 전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고구마가 요망진 단맛으로 사람을 홀릴 때 진중한 감자는 단맛은 좀 덜어두고서라도 푸근하고 담백하게 다가온다고 느꼈다. 광고만 봐도 고구마 광고는 끈적하게 늘어진 당을 강조하며 화려한 단어들로 단맛을 강조하는 반면 감자는 담백함과 고소함을 내세우지 않는가.
상품 사진마저 접근이 다르다. 고구마가 갓 구운 샛노란 속을 보여주는 반질반질한 사진인 반면 감자는 대체로 흙을 뒤집어쓴 밭 배경 사진이다. 이 둘은 비슷한 듯 알고 보면 참 다르다.
퇴근길, 쏟아지는 비에 좌우로 바삐 움직이는 와이퍼를 보며 찐 감자가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포슬포슬 담백한 찐 감자.
역시나 오늘도 감자는 맛있었다. 푸근했고, 따뜻했고, 담백했다. 노곤함이 풀리는 맛이었다. 나의 소울푸드, 지친 하루에 온기를 주는 찐 감자, 정말 감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