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네?!'
뜨개질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대체 어떻게 힘을 조절하는 걸까? 적당히 힘을 조절하면서 실을 이리 뜨고 저리 뜨면서 완성품을 만드는 뜨개질러들을 보고 있으면 완급 조절 능력이 경이롭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아 글쓴이는 뜨개질을 못하는구나’ 그렇다. 나는 뜨개질을 못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뜨개질을 배운 건 초등학교 실과 시간이었다. 나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심지어 ‘내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잘 뜨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까지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는 뜨개질로 거의 모든 걸 만들어내는 만능뜨개질러였기 때문이다. 뜨개를 잘하는 유전자는 이미 내 안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엄마 닮은 손재주로 그렸다 하면 상장받고, 만들었다 하면 작품전시회 출품하는데 뜨개질을 못할까.
천만다행이었다. 친구들에게 나는 뜨개질을 잘 할 것 같다고 섣불리 말하지 않은 것은. 엄마에게 물려받은 손재주에 뜨개질은 없었다. 안뜨기와 겉뜨기를 배우는 것까지는 수월했으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완급조절을 못해서 얼마 뜨기도 전에 짜임이 너무 뻑뻑해졌고, 친구들이 목도리 반을 뜨는 동안 나는 다시 실을 풀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실을 풀고 뜨고 풀고 뜨고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노력이 보상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졌다. 결국 목도리 뜨기를 포기했고, 그 이후 한 번도 뜨개질을 하지 않았다.
무기력을 호소하던 요즘, 어제 문득 그때 뜨다 말았던 목도리가 생각났다. 그 목도리는 나 같았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있었다. 처음에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열심만 남아 뻑뻑해질 대로 뻑뻑해진 상태. 안뜨기를 하든 겉뜨기를 하든 실을 짜려면 바늘이 짜임에 들어가야 하는데 바늘을 넣을 수가 없는 빽빽함.
항상 무언가 뜨고 있었던 엄마의 뜨개질 작품은 실의 짜임이 적당히 성겼다. 바늘코가 무리 없이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다. 엄마를 비롯해 주변에 뜨개질을 잘하는 사람들의 작품을 보면 짜임이 가벼웠다. 삶을 뜨개질하듯 짜내려 간다고 했을 때 실이 드나들 수 있도록 사이사이 틈과 여백이 필요했는데 난 그 틈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삶을 너무 쪼였던 것 같다. 이제 실을 풀고 다시 떠야 하지 않을까. 훌륭한 뜨개질러였던 엄마는 뜨개질을 할 때 뜨던 것을 풀어서 다시 더 멋진 걸 만들어내곤 했다. 아깝지 않냐는 말에 또 짜다보면 금방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였다. 학교를 다녀오면 엄마는 또 다른 멋진 것을 만들고 있었다. 뜨개질을 하는 데 있어서 실을 풀고 다시 뜨는 건 자연스러운 일 같았다. 실을 푸는것도 실을 짜는 것도 모두 뜨개질이었다.
내가 가진 실은 충분하다. 또다시 짜고 푸를지언정 바늘이 드나들 틈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휴우.
*뜨개질러 친구에게 듣기로 나처럼 힘 조절 못하는 친구들을 '쫀손(쫀쫀한 손)' 이라고 부른단다. 나...쫀손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