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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싱장에서 알게 된 나

내 몸의 움직임이 말해주는 나에 관하여

by 정예예


운동을 좋아한다. 움직임을 통해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다. 나를 이루는 것 중에 가장 솔직한 나의 몸. 특히 코치가 있는 운동을 할 때면 ‘몸의 움직임을 통한 나 발견’은 더 쉬워진다.


연말 원데이 클래스로 펜싱을 배웠다. 1시간 정도 기본기를 익히고, 이후 1시간을 참가자들끼리 1:1 대련하는 클래스였다. 그때 코치가 해준 말이 아직도 종종 떠오른다.


“예인님이 몸을 움직이는 걸 보면, 예인님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온 사람인지 보여요.”


신기했다. 그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인데, 나의 움직임을 통해 그는 나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된 것 같았다. 나 또한 새롭게 나를 발견하는 지점들이 많았다.


여러 운동을 해봤지만 1:1 대련이 있는 스포츠는 처음이었다. 혼자 수련을 하거나 그룹으로 경기를 하는 것과는 달랐다. 1:1 독대의 긴장감이란. 승부가 있는 운동이었다. 근데 협동해서 승리를 얻는 게 아닌 지금 이 순간, 나의 판단과 행동으로 이기고 지는 것이 결정되는 게임. 그렇다면 난 지금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지? 목적은 하나, 이기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첫 번째 경기

어차피 상대도 나도 초짜. 그렇다면 이 게임에서 이기려면? 먼저 용기를 내는 쪽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경기 시작 소리가 울리고 성큼성큼 상대를 향해 다가가 냅다 찌르기 시작했다. 나도 몰랐던 기세, 빠른 실행, 거친 공격력. 나 제법 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릴 적, 너는 승부욕이 없냐고 한숨 쉬던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승부욕이 너무 있어서 아예 이기지 못할 싸움은 덤비지 않았던 건 아닐까. 아마 그런 경우도 왕왕 있었을 거다.


두 번째 경기

두 번째 상대를 만났다. 나에 비해 팔다리가 길고 가볍게 이리저리 몸을 잘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코치가 기본기를 알려줄 때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펜싱은 자기 몸을 이용해서 하는 스포츠예요. 자기의 단점도 활용하면 강점이 될 수 있죠.” 나의 강점. 내겐 오랜 기간 단련해 온 하체 근력이 있고,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기세가 있다. 그리고 상대의 치부를 찾고야 마는 집요함이 있다. ‘목’ 상대방은 몸을 이리저리 유연하게 잘 꺾지만 목 부근은 거의 위치가 고정된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난 우직하게 돌진해 목부터 노린다. “삐!” 승점 획득.


몇 번의 승리를 맛보고 함께했던 사람들과 경기를 돌이켜보며 나 자신에게 많이 놀랐다.


이기기 위해 상대를 얼마나 분석하고, 공격포인트를 잡아 빠르게 실행하는지

무서우리만치 얼마나 거침없이 돌진하는지

찔렸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 얼마나 집요하게 끝까지 찔러대는지

대련 상대로서 눈빛이 얼마나 사자 같은지

그동안 단련해 온 하체는 얼마나 든든하고 강한지


아예 몰랐던 면모는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폭발적으로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다는 건 몰랐다. 그리고 이게 상대방을 겁나게 만들 정도로 효력이 있는지도 몰랐다.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야성이 이런 모습이었던 걸까. 코치의 말대로 내 몸의 움직임으로 내가 살아온 삶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됐다. 그간 열심히, 성실히 살아온 것이 몸에 남아있다니, 자연스럽게 발휘될 수 있다니. 애써 살아온 지난 삶에 대해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문득 그날의 경기들을 다시 떠올린다. 다시 경기한다면 난 또 어떤 나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까? 내 움직임에 무엇이 남아있을까?

한 주를 마무리하며 내 몸에 남을 것들을 기대한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어느 날 또 만나게 될 거다. 삶은 거짓으로 살 수 없고, 몸에는 진실이 남겠지.


*몸으로 체득한 깨달음은 유효기간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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