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회사라는 공간에서 살아남기 힘든 포지션같다.
기본적으로 사람 한명이 다양한 퍼소나를 가지면서, 다양한 종류의 메타인지를 발휘해서 우리 비즈니스를 위해 프로덕트 차원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알아주든 아니든, 파수꾼같은 역할을 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만난 회사들의 업무환경은 결단코 프로덕트 디자이너, 나아가 팀에게 그닥 친절하지도 않았다. 열악하면 열악한대로, 그냥 주어진 환경 안에서 어떻게든 먹히는 돌파구를 찾거나 만들어, 모두를 위해 뚫어줬어야 했고, 지금도 그런 역할로 일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그런 험난한 환경 - 쏟아지는 일더미로부터 탈출하고, 회사를 위한 올바른 중심잡기를 위해 나는 어떤 것들을 실천하고 있는지 기록해보고자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현황에 대해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플랫폼 역할뿐아니라 고객을 위한 컨텐츠도 자체 생산한다. 즉, 프로덕트가 곧 컨텐츠이자 그 반대이기도 한 것이 이 회사 비즈니스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회사는 영업팀, 마케팅팀, 컨텐츠팀(이는 컨텐츠 성격별 하위 2-3개 팀으로 더 분류된다), 프로덕트팀 등 업무 유형별로 팀이 나뉘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생각보다 cross-functional하고 유연하게 협업하는 문화를 기대하기는 조금 힘들다.
또한 비즈니스의 특성상, 우리회사는 상대적으로 컨텐츠를 생산하는 팀, 내지는 고객유치를 위해 힘쓰는 영업팀들이 고객과 비즈니스 최전선에서 프로덕트 팀보다도 훨씬 접점을 갖는 형태를 갖고있다.
하지만 그렇게 다양한 유형의 고객들을 여러 팀들이 각각 상대하다보니, 무언가 좀 안정된 환경, 일정한 패턴 속에서 협업이 이뤄지기보다 각 부서로부터 다양한 형태와 니즈를 지닌 요청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다. (그것을 매일같이.. 참고로 난 월요병이 생겼다.) 그리고 각 팀 모두가, 자신의 요구사항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흘러가는 모양새 자체가 이러하니, 자칫하면 그저 바람에 흩날리는 메모장처럼 휩쓸리기 쉽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면, 프로덕트가 제대로 된 비즈니스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고객 불만사항 조각보가 되어 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 그냥 둘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올해 들어 회사가 내부적으로 상황이 조금 힘들어지면서 우리 모두는 위기의식을 갖고 어떻게든 비즈니스를 다시 궤도에 안착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 불안하고 조급하게 만들었으며, 원래도 무분별하게 쏟아지던 제안과 요청들의 양을 증폭시키고, 또 그런 혼란을 더 빈번하게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불안과 압박을 느끼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이 회사가 망하면 나의 백년지대계가 무너질 수 있기에, 더욱이 잘 문제를 헤쳐가야겠다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됐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속에서 회사에 도움이 되기 위해, 또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나는 UX디자이너, 비즈니스 매니저(같은), 그리고 데이터 분석가 등 다양한 퍼소나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특히나 지금 내가 당장 성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해관계자들이 항상 프로덕트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비판적인 자세를 갖추고, 이해관계자들이 현실을 더 잘 직시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천해왔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1. 현 시점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비즈니스 목표 재확인
우선, 지금 우리가 무엇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는지부터 명확히 알기 위해 이해관계자들과 소통을 통해 빠진 부분들을 채워간다. 물론 비즈니스로서 달성해야 할 목표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내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어떤것인지, 왜 그런지에 대해서다. 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 목표에 동기화시켜야만 나혼자 엉뚱한 것에 사로잡혀있지 않으면서 필요한 곳에 내 자원을 제대로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라는 사람은 어떤 한가지에 꽂히면 적어도 흥미를 잃기 전까지는 지구끝까지 쫓아 파고드는 경향이 있기에, 이런 성향을 득이 되도록 올바르게 제어하려면 상위 목표와의 싱크 맞추기는 필수다.
2. 비즈니스 기대효과 구체화
우리회사의 이해관계자들은 고객과 가장 맞닿아있기 때문에, 그들의 반응에 대해 민감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에 몰입돼있는 편이다. 그렇다보니 그들이 어떤 제안이나 요구사항을 들고 올 때, 그것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지곤 한다.
a) 당장의 문제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결론만 담고있다.
b) 뚜렷한 비즈니스 목표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 안건을 들고 무작정 디자인 프로세스에 돌입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게 하기때문에 좋지 않다. 스타트업이 되려고 하는 프로젝트, 스타트업 등 몇가지 유형을 경험하면서 느낀 바에 따르면, 니즈에 대한 명확한 그림 없이는 프로젝트도 결국 늘어지고, 사람들은 지치며, 결과도 산으로 가는데 최종 목표는 커녕 중간목표에조차도 골인 못하는, 그런 비극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언제나,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보고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연구소가 아닌 회사다. 수익이 되는 목표와 더 부합하는 것을 찾고, 우리가 가진 자원을 그에 좀 더 잘 쏟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면에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 때, 나는 그 열정에 공감하는 내 또다른 자아를 잠시 눌러두고, 그것이 우리의 현 비즈니스 목표와 관련해 어떤 가치를 갖는지, 우리에게 어떤 이득을 줄것이라고 보는지 명확하게 정의를 확립하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그 설명들 없이는 디자인 목표수립도 안된다.)
3. 생각의 길잡이
대개 큰 재앙이나 재난을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급격하게 동요한다. 멘탈이 흔들리고, 원래도 우리 인류는 근시안적이고 즉흥적 경향이 더 강한 존재이지만 심리적 요인때문에 더욱 근시안이 되고, 결과적으로 쓸데없이 더 큰 대가를 치러 결과에 도달한다.
어차피 겪을거라면, 가장효율적으로.
이것이 개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라면, 나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있을것 같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다르다. 고생길이 뻔한 상황이어도 최대한 모두의 멘탈을 지키기 위해, 나는 더욱 종합적인 시각에서 그들이 올바르게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한다.
a) 프로덕트 발자취 돌아보기
과거 행적을 돌아보는 이유는, 이미 검증된 것을 쓸데없이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과거에 우리가 어떤 가설들이 있었고 그 결과는 어땠으며, 혹 재고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금과 그때는 무엇이 달라서 가치가 있을지.. 당시에 그런 결과를 도출했던 가장 가능성 높은 요인은 무엇이었는지 이런저런 다양한 측면에 대한 '회고'를 통해 지금의 요구사항/제안에 대한 가치평가를 위한 토대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생각보다 인간은, 머릿속에 많은걸 담아두며 살지 않는다. 최근 읽고 있는 책에 보면 'WYSIATI(What you see is all there is: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지금 당신의 눈앞에 놓여진 그것이 전부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의사결정을 내릴 때, A-Z에 대한 기억과 이해를 바탕으로 심오한 사고과정에 의해 결론을 내리는 것 같지만, 사실 쉽게 떠올려지는 양에는 한계가 있어 당장에 주어지는 것들을 토대로 쉽게 결정해버리거나 판단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점에서, 이런 과정은 나에게 필수적이다.
b) 데이터 들여다보고 영향력 따져보기
다음으로는 사용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을 주기적으로 점검한다. 당연히, 하락하거나 너무 오래 지지부진 하고 있는 모든 것은 비즈니스에게 있어 '문제상황'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우린 그 모든걸 마술 지팡이를 휘둘러 한번에 짠! 해결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시급성(urgency)또한 판단해 어떤 문제를 더 우선순위에 배치할 지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A기능과 B기능이 있는데 둘 다 이용률 하락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둘 다 최우선시 되고 있는 현 비즈니스 목표 C에 직접적 관계가 있다. 그럴 경우, 두 A와 B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큰 하락세를 보여주고 있는지는 데이터를 통해 간단히 파악할 수 있다. 물론 퍼포먼스 하락이 더 크다고 해서 늘 더 중요한 사안으로 정의되진 않지만, 비등비등한 상황에서 우선순위를 가려내야 할 때, 평소 10명의 사용자에서 7명의 사용자로 줄어든 케이스와 1,000명의 사용자에서 200명이 감소한 케이스를 비교하면, 두 개 모두 사업적 impact가 큰 경우라는 가정하에서는 후자에 먼저 집중할 수 밖에 없다.
c) 효율적인 로드맵과 scope 정하기
그럼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면, 어느 하나를 끝낼 때 까진 다른 건 다 미뤄둬야 할까? 아니, 그렇지 않다. 이건 사안들과 상황의 시급함에 따라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데, 회사의 일이란 건 대체로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며 이미 그 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많은 다른 것들과 특정 시점에서부터 오버랩되어 누적되는 속성이 좀 있다. 더군다나 상황이 심각하다면, 여유넘치게 한번에 하나씩만 파고들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또다른 문제상황을 피하기 위해, 꼭 1순위가 아니어도 다른 순위의 내용들에 대해 최소한, 그리고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대응책을 이해관계자들과 논의해서 자그마한 quick wins라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이전의 작업들을 통해 모아진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그 scope을 잡는다.
나는 이미 내가 현상황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이것만 하면 다 된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비즈니스에 대해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B2C 고객의 경우, 관련 입문강의도 듣고, 실제로 밖에 나가 업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자 익힐 기회가 많았다. (그동안 잔업이 너무 빡세서 많이는 못했지만...) 하지만 현재 회사가 가장 관심을 쏟고있는 B2B 고객에 대해서는, 그동안 제약적이었던 나의 포지션으로 인해, UX디자이너로서도 아직 그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공감을 쌓아왔다고 보기 어렵다.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임하며,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으려면, 그들이 알고 있는 것까지 나도 두루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B2B 고객에 대한 이해도를 키우기 위해 비즈니스 이해관계자들과 더 가까이에서 자주 소통하고, 자체 컨텐츠도 계속 소비하면서 더 깊은 역지사지를 실천해 보려고 한다.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B2B 고객에 대해 공부하면서도, 그들의 시각에서 지금의 우리 프로덕트가 어떤 잠재적 불만이나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을지 짐작해보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회사에게 가치있는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아마도 모든 프로
트 디자이너들의 뒤를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질문일 것 같다. 내가 이 시기에도 내 매니저와 계속해서 상담하고, 조율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과정은 참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쏟은 노력과 시간만큼 점차 내가 원하는 쪽으로 상황들이 움직여져 주는 것이 보일 때, 이런 고통도 잊게 해주는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