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지기 Aug 13. 2021

인어 공주와 바다 마녀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언니! 뭐해?”


 우렁찬 소리에 물살이 크게 출렁였다. 고래 소화제 개발에 집중하던 바다 마녀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비커를 놓쳐 버렸다. 바다 마녀의 연구실에 인어 공주가 들이닥친 것이다. 인어 공주는 바다에서 제일가는 목청으로 유명했다. 본래 인어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 나는데, 이상한 돌연변이가 생겼는지 막내 인어 공주만은 아무리 깊은 바다에서도 또렷이 들릴 정도 크고 선명한 목소리를 가졌다. 


 “으아, 너 때문에 망쳤잖아! 흰긴수염고래 님이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에 소화가 안된다면서 의뢰한 건데…….”


 바다 마녀가 울상을 지었다. 흰긴수염고래는 태평양의 큰손으로, 바다 마녀의 단골이었다. 바다 마녀는 인어 공주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한쪽 다리만 뒤로 뻗어 살랑 인사했다. 그러고는 한 다리로 아까 놓친 비커를 집어 책상에 올려두고, 다른 한 다리로는 스펀지를 들고 쏟은 물약을 쏙쏙 빨아들였다. 나머지 다리들도 분주하지만 우아하게 제각각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다리가 열 개라는 건 바다 마녀 같은 워커홀릭에겐 좋은 일이었다.


 “언니, 언니! 있잖아……. 오늘은 나도 고객으로 왔으니 아는 척 좀 하시지?”


 문 앞에서 인어 공주가 꼬리지느러미를 팔딱이며 불퉁거렸다. 할머니가 공주의 상징으로 꼬리에 꼭 달고 다녀야 한다며 끼워 준 굴 장신구가 오늘따라 더 거슬렸다. 바다 마녀는 마지못해 실험 도구를 내려놓고, 응접실 쪽 의자를 가리켰다. 응접실은 벽과 천장이 온통 보라색과 빨간색 말미잘로 뒤덮였고, 바닥에는 노란색 산호가 깔려 있었다. 


 “아유, 정신없어! 언니, 이런 인테리어는 우리 할머니 시대에나 하는 유행 지난 거라고 내가 말했잖아. 아직도 안 바꾼 거야?”


 “기집애야, 일하느라 바쁜데 한가하게 인테리어나 바꿀 시간이 어디 있냐!”


 오늘도 인어 공주와 바다 마녀는 그들만의 덕담을 사이좋게 주고받았다.


 “그래, 오늘은 고객님으로 오셨다면서? 뭐가 필요한데?”


 바다 마녀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인어 공주는 얼마 전 바다 위로 올라가 만난 왕자 이야기를 꺼냈다. 바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잘생김이라며 삼십 분 동안이나 연신 감탄을 해대더니, 그 왕자와 꼭 결혼을 해야겠다는 거였다.


 “뭐, 결혼? 야, 네 아버지가 널 대서양 왕국의 왕자와 결혼시키겠다고 했잖아. 게다가 인간이라니? 다리도 없는 주제에 어떻게 인간을 만나 결혼하겠다는 거야?”


 인어 공주의 황당무계한 말에, 꾸벅꾸벅 졸던 바다 마녀가 놀라서 퍼뜩 깼다.


 “아, 그건 아빠 생각이고. 내 인생이잖아! 그리고 간단한 일 같았으면 내가 언니의 괴상한 연구소까지 찾아왔겠어?”


 인어 공주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태연하게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다. 공주는 바다 마녀를 ‘무엇이든 못 만드는 게 없는 천재 중의 천재’에다 ‘너그러운 바다의 치료자’로 치켜세우며, 바다 마녀에게 꼬리지느러미를 두 다리로 바꾸는 묘약을 사겠다고 했다. 그런 다음, 왕자의 성으로 통하는 냇가까지 헤엄쳐 올라가 묘약을 마시고, 왕자에게 청혼하겠다는 거였다. 이미 다섯 언니를 바다 위로 급파해 왕자가 사는 곳을 알아 놓았다고도 덧붙였다.


 “대애단하다! 흠……. 그런데 값은 무엇으로 치를 거야?”


 바다 마녀는 생각보다 당돌하고 치밀한 계획을 듣고, 요즘 것들은 다르긴 다르다고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장사 수완을 발휘해 물었다.


 “값? 우리 사이에?”

 “네 아빠 삼지창을 가져다줘.”


 은근슬쩍 퉁치려는 인어 공주에게 바다 마녀가 딱 잘라 말했다. 


 “네가 말한 건, 아주 만들기 어려운 묘약이야. 내 다리 열 개 중에서 두 개를 잘라 넣어야 하는 거라고. 그만한 값은 치러야지. 그리고 네 아빠는 이 태평양을 너무 오래 다스렸잖아. 요즘 같은 때에 절대왕정이 말이 되니? 새로운 시대에, 민주적인 새 리더가 필요하지 않겠어?”


 갑자기 아빠의 삼지창이 왜 필요하냐는 인어 공주의 물음에, 바다 마녀가 답했다. 인어 공주의 아빠는 태평양의 왕이었다. 태평양의 왕을 상징하는 게 삼지창이었으므로, 삼지창을 달라는 것은 아주 중대하고 정치적인 문제였다.


 “킥킥 뭐야, 왜 갑자기 이런 야욕을 드러내실까? 솔직히 삼지창을 갖다 주긴 힘들고…… 음, 언니가 권력을 원하는 거면, 언니 스스로 쟁취해야지! 내 목소리 어때? 이 목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연설하면 처칠도 울고 갈 거야.”


 인어 공주의 뜻밖의 제안은 일리가 있었다. 권력의 정당성도 얻어야 했기에, 바다 마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언니, 대신 덤으로 언니의 먹물을 무한 리필 해 줘. 목소리를 잃었으니 뭐라도 글로 써서 청혼해야 할 거 아니야.”


 인어 공주도 수완이 만만치 않았다. 바다 마녀는 픽 웃으며 눈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깔때기를 쭉쭉 짜서 삼각 플라스크에 먹물을 담았다. 얼마 후 플라스크가 다 차자, 코르크로 입구를 단단히 막아 인어 공주에게 건넸다.


 “자, 인심 썼다. 다 떨어지면 언제든 찾아와. 묘약은 내일까지 완성해서 가오리 우편으로 부쳐줄게. 그런데, 왕자가 청혼을 거절하면 어떻게 하려고? 묘약을 먹고 두 다리를 얻으면, 다시 꼬리지느러미로 되돌릴 수 없어.”


 바다 마녀가 걱정스러운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음…… 그럼, 바닷속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대작가가 되지 뭐! 언니의 먹물이 꽤 많이 필요할지도 몰라!”


 걱정한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명랑한 한마디를 내뱉고는, 인어 공주가 말미잘 촉수를 산들산들 피해 헤엄치며 바다 마녀의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공주가 떠난 자리에는 실한 굴 한 조각이 휘갈겨 쓴 쪽지와 함께 남아 있었다.

 


언니, 잘 지내! 재밌는 소식 있으면 편지할게!

             -장차 여왕이자 대작가가 될 자랑스런 친구가- 




작가의 이전글 23년째 나의 애착인형, 미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