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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기 Dec 06. 2019

23년째 나의 애착인형, 미키

오래 쓰는 사람 2

초등학교 때 엄마에게 미키 인형을 선물받았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연보라색 구두를 신은 봉제 미키 인형. 어느새 20여 년 동안 우리집에 나와 함께 있다. 총 길이 30센티미터쯤 되는 미키는 눈동자와 하얀 손에 때가 조금 탔고 몸통의 검정 부분에는 드문드문 먼지가 꼈으며, 연보라색 구두는 내 기억이 아니라면 본래 연보라색이라고 여기지 못할 만큼 색이 바랬다. 그렇지만 발목에 붙은 상표가 헤진 것을 빼곤 뜯어진 곳 없이 말짱하다. 당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음에도 만듦새가 좋은 것을 보니 디즈니 정품을 산 것 같다. 엄마는 내가 7살 때쯤 이 인형을 고양시의 한 백화점에서 1만원 넘는 가격에 산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외의 구체적인 기억은 '전혀 없다'고 한다.

나의 기억은 엄마와 좀 다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골에서 할머니댁으로 와서 살 때 미키 인형을 선물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내게 인형을 건네주며 "손 빨지 말라고 사 준 거야."라고 말했다. 창피하게도 나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엄지 손가락을 빠는 버릇을 못 고쳤다. 얌전하고 말도 잘 듣는 큰 딸이 희한하게 다 커서까지 아기처럼 손을 빨고 있으니 엄마가 걱정스러웠을만하다. 나 스스로도 부끄러워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버릇을 고치는 게 쉽지 않았다. 들킬 때마다 혼이 났으니 최대한 숨기려고 이불을 교묘하게 코 밑까지만 덮어 손가락 안 빠는 척 가리기도 하고, 손가락 빠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빠는 나름의 노하우도 습득했다. 

왜 그렇게 손가락 빠는 것에 오래도록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프로이트는 손가락 빠는 버릇이 구강기 때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지 않아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고착되어 나타나는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고착현상이 일어나면 성장 후에도 담배, 과음, 수다, 과도한 입맞춤, 물 등을 너무 자주 마시는 것 등의  구강기적 성격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무려 세 살까지 모유를 맘껏 먹는 호사를 누렸다. 구강기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애써 이유를 찾아보자면 너무 오래 모유를 먹은 탓에 습관이 되었고, 심심하거나 안정감이 필요할 때 습관적으로 그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내 입 안에 딱 들어맞는 엄지손가락의 익숙한 살맛은 무의식에 엄마 품에서 느낀 안정감을 불러일으켰고, 손가락을 빠는 규칙적인 리듬감이 여기에 안정감을 더했을 수도. 엄마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 엄마 없는 긴 시간을 동생들과 함께 보내는 일은 의지할 곳 없는 느낌이었고, 책임감에 막막하기도 했다. 숙제를 하고, 밖에서 동네 친구들과 뛰놀거나 텔레비전을 봐도 시간은 더디 흘렀다. 긴장되고 심심한 시간을 손가락 빨면서 그럭저럭 차분하고 멍하니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미키인형을 받았을 당시에 솔직히 미키 인형이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엄마가 나를 생각해서 사 주신 선물이란 것에 특별함을 느껴 애정이 갔다. 처음에는 엄마의 성의를 생각해(?) 손가락을 덜 빨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키 인형 때문에 손가락 빠는 버릇을 단번에 고칠 수는 없었다.

부끄러운 버릇을 생각나게 하고, 그 버릇마저도 고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미키인형을 어릴 적 물건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간직하며 챙기는 이유는 미키인형이 내게 주어진 그 이유 때문이다. 엄마의 품을 대신하기 위해 엄마가 내게 선물해 주었다는 것. 그래서 미키인형은 내가 가장 연약할 때 비밀스럽게 의지할 작은 존재가 되었다.



생명을 가진 누구나 불안하고 버거운 현실에서 안정감의 항구로 돌아가고자 노를 젓는다. 강아지는 애착방석을, 아이들은 애착담요를, 어른이 되었어도 버리지 못하는 미키인형을, 따뜻한 기억들을 꼬옥 붙든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불안과 초조가 어두운 방에 곰팡이처럼 번져가는 밤이면,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 애쓴다. 누군가에 기대어 자랐던 기억들, 그중에서도 특히 잠이 올만큼 긴장이 풀어지고 안심했던 기억들이다.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선선한 바람에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을 몽롱한 눈으로 보았던 날, 엄마랑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푹 몸을 불린 다음 때를 밀고 나와 노곤하고 보송한 기분으로 꿀잠을 잤던 날, 바닷가에 놀러가서 밖에 텐트를 치고 자는데 아빠가 밤새 보초를 서 주어 안심하고 잤던 기억,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지은 옥수수, 감자를 실컷 먹고 배불러서 졸렸던 일, 할머니와 노랗고 동그란 매주콩을 수도 없이 골라내다 졸음이 왔던 일... 하나하나 불러내어 콜라주하듯 오리고 붙이고 하며 잠을 청한다. 


험한 세상에서 먹고살려면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버텨야 할 것 같다. 두렵고 무서워도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겨야 무너지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때. 추억에 젖는 감상이 사치로 느껴지고, 미키인형 같이 무용하지만 특별한 물건들이 유치하게 느껴질 때. 이런 것들이랑 집어치우고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기 쉽다.

그런데 이러한 '노젓기'는 '강해지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가장 연약하고 수치스러운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야하기 때문이고, 지금 나는 너무 무섭고 두렵다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불안과 우울, 절규의 물결을 거슬러 항구를 바라보며 있는 힘껏 노를 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대단한 '결단'이며, 현실의 절망이 이끄는 대로 나를 흘려보내지 않도록 애쓰는 도전적인 '실천'이다.

  


때때로 고독 속에서 홀로서기해야 할 시기도 있겠지만, 이유를 모르는 불안과 우울로 존재가 흔들릴 때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에게 기대었던 기억을 더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른'인 양 이런 기억들을 시시하게 여길수록 스스로 고립될 것이고, 기댈 곳 없이 '혼자'라는 건 이 순간 가장 두려운 일일테니까. 그러니 잠이 오지 않는 밤, 때 탄 미키 인형을 찾아 머리맡에 두는 일은 충분히, 폭풍우치는 바다를 홀로 떠다니는 나를 붙들어 맬 한 가닥 밧줄이 된다. 밧줄에 묶여도 여전히 파도에 출렁이겠지만, 망망대해로 떠내려가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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