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쓰는 사람 1
지금 쓰는 텀블러는 나의 두 번째 텀블러이다. 한창 텀블러 쓰기 붐이 일었던 때. 나는 그 몇 년 전부터 텀블러를 쓰고 있었다. 첫 텀블러는 아주 까다로운 조건으로 골랐다. 쓰레기 만들기 싫어서 불편을 감수하며 소지하고 다니는 텀블러이니 취지에 맞게 아주 오래 쓸 수 있도록 내구성이 좋을 것, 통학하며 이고 지고 다니는 짐에 1g이라도 덜 보태도록 최대한 가벼울 것, 질리지 않을 디자인일 것. 이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텀블러를 학교 앞 커피점들을 돌아다니며 물색한 결과, 마침내 적당한 텀블러를 찾았다.
겨울로 접어드는 조금 쌀쌀했던 날, 삼거리 모퉁이에 따뜻한 불빛을 비추는 커피점에서 보라색 텀블러를 골랐고, 아르바이트생이 부드러운 말과 함께 정성스레 포장해주었다. 그 기억과 분위기가 뜻밖에 아직도 남아있다.
대학생활 거의 모든 일상에 이 텀블러가 있었다.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공부하거나 잠을 쫓으며 커피와 홍차를 담아 마시고, 1호선 통학 여행에 필요한 물을 채워 다녔다. 항상 가지고 다녔지만, 너무도 일상적이기에 특별한 존재감이나 에피소드는 없는 물건이다.
어느 날엔가, 잘 씻어 다닌다고 생각했던 텀블러를 들여다보니 바닥에 홍차, 커피 떼가 까맣게 묻어 있었다. 세제로도 지워지지 않아서 버려야 하나 고민하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베이킹소다를 뿌리고 식초를 부어 세척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상쾌한 소리와 함께 잘잘한 흰 거품이 일며 홍차 떼가 깨끗이 지워졌다. 그래서 스타벅스 등 많은 커피점에서 출시하는 예쁜 텀블러들로 쉽게 갈아타지 못하고 오래오래 썼다.
지금 사용하는 두 번째 텀블러는 2014년 과 졸업선물로 받은 것이다. 첫 번째 텀블러와 색깔만 다른 같은 용량, 같은 종류의 것이기에 실제보다 더 오래 쓴 것처럼 익숙하다. 이 텀블러의 내구성과 탁월한 기능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몇 가지 장점을 나열해 보자면, 스텐 재질이지만 비교적 가볍고, 밀폐가 잘된다. 여태껏 가지고 다니면서 티백의 실을 밖으로 걸친 채 뚜껑을 닫아 놓았을 적을 제외하곤 음료가 새어 가방 속 소지품을 망쳐본 적 없다. 또 차망이 있어 잎차를 마실 때 좋고, 오래 써도 보온기능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전 것과 똑같은 디자인인 데다 유행도 지나 더 예쁜 텀블러들이 넘쳐났지만 오랜 시간 일상 속에서 별다른 불편함 없이 계속 쓰다 보니 텀블러의 외면보다 내면을 보는 눈이 생겼는지(?) 이제 '예쁜 디자인'이 텀블러 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하진 않는다. 오랫동안 사용하며 세척을 빠르고 깨끗이 끝내는 방법이 무엇인지, 뜨거운 차를 넣고 어느 정도 뚜껑을 열어 놓아야 마시기 알맞게 식는지 등 내게 편리한 사용법을 체득했다. 나름 오래 알고 지낸 사이로, 자연스럽고 익숙한 관계가 된 것일까.
번갈아가며 쓰는 또 하나의 텀블러, 나의 오래된 텀블러와 함께 찬장에 놓인 남편의 텀블러는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텀블러라기보단 보온병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게 생긴 이 물건을 언제부터 썼는지 남편에게 물으니, 실제로 사용한 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가지고 있었던 거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중학교 때쯤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가정집에 한 개쯤은 있던 보온도시락 세트의 구성품 중 하나인 텀블러는 찬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거나 차나 커피를 많이 마시는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에 사용할 일이 없었단다. 소풍가거나 아주 추운 날 등 특별한 경우에만 가끔 꺼내 썼던 물건인데, 결혼하고 집을 옮기며 어쩌다 가져오게 되었다. 요즘에는 이 텀블러로 허브차를 주로 많이 마시는데 이전에는 어묵을 넣어 먹었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11월도 어느새 끝자락, 이루지 못한 일들과 소원해진 관계들이 진득하지 못한 내 탓이라 자책하기 쉬운 계절. 마음이 낙엽처럼 찬바람에 뒹굴던 중, 텀블러만큼은 오래도록 열심히 써 온 걸 새삼 알았다. 오늘도 텀블러에 담긴 따끈한 차로 마음을 덥혀야겠다.
텀블러 오래 쓰기 참고 사항
텀블러를 오래 쓰면 납 등 중금속에 중독되기 때문에 6개월의 한 번씩 교체해줘야 한다는 기사를 봤다. 오래 쓴 텀블러를 아무리 뜯어보아도 새것의 상태와 크게 다른 점이 없고, 실제 나의 몸에도 이상이 없어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기사였다. JTBC에서 팩트체크한 내용을 찾아보니, 텀블러의 재료인 스테인리스 스틸은 납을 포함하지 않고, 녹이 슬지 않기 때문에 커피 차 등 뜨거운 액체를 넣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탄산음료나 김치 등 산성을 띠거나 고염분 음식을 넣지 말라고 권고하기도 하지만, 한 연구에서 이 또한 중금속 우려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깨지거나 망가져서 텀블러로 기능하기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오래오래 일상을 함께해도 좋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