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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다서영 Jan 17. 2024

수호천사

짧은 이야기(소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내가 악마가 아닌 천사를 선택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지만, 이미 지나간 선택이다.

나는 악마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천사를 선택했다면, 복수는 꿈도 못 꿨을 테니까. 

그놈이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내가 악마가 되어버리는 것이 낫다.


그래서 나는 악마를 선택한 일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

오늘은 그놈에게 복수하러 가는 날이다. 나는 이 날을 위해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환하게 웃는 그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 힘겹게 버텨냈다.


바로 이 날을 위해서. 복수를 위해서.

나는 어느 건물 앞에 섰다.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이 새하얀 건물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건물 앞에 서자 작은 설렘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깔끔한 정장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두근거렸던 심장이 차갑게 식어갔다. 나는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 있으면 곤란했다. 이제 와서 망칠 수는 없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데, 저 멀리 사촌언니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언니. 여기.” 내가 손을 흔들자, 언니는 이제 갓 돌이 된 아이를 품에 안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 진짜 잠시만 맡아줘. 애 아빠가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정말 미안해.”
언니는 아이를 넘기며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아. 언니네 집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나오던 길이었어.”
악마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타이밍 맞게 조카를 돌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육아휴직 중인 사촌언니는 몇 개월 만에 바깥나들이에 살짝 상기된 표정이었다.
“아는 사람이 결혼하나 봐?" 언니는 아이 용품을 넘겨주면서 재빠르게 건물 안을 훑었다. 순간 긴장했지만, 나는 태연하게 아이를 달래며, 언니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 늦었다며.”
“하필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해서. 애 아빠도 오늘은 진짜 힘들다고 하고. 일이 꼬이려고 하니, 다 꼬이네. 하여튼 빨리 갔다 올게. 일 끝나면 바로 전화할게.” 언니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물끄러미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엄마가 없는 걸 알았는지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를 달래며 서둘러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내가 수호천사를 버린 날.
그날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그리고 생애 최악의 날이기도 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읜 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그래서 하루빨리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는 아직은 어리다는 말로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그 일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는데, 때마침 아이가 생긴 것이다.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행복했었다. 남자친구는 임신했다고 하면, 분명 결혼하자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임신 소식을 전하러 가는 그 잠깐 동안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이? 아이라고?”
남자친구의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오늘이 최악의 날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네가 신경 쓴다고 했잖아. 그래서 피임은 필요 없다며. 너 설마, 결혼하자, 결혼하자 그러더니 일부러 그런 거야?”
내 양 어깨를 잡고 사납게 흔드는 남자친구가 무서웠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떠오르게 했다. 남자친구는 내가 알던 자상하고 책임감 강한 그 남자가 아니었다.


남자친구는 그놈이었다. 아버지와 똑같이 끔찍했던 바로 그놈.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나는 엄마처럼 살 수 없었다. 그놈이 내 팔을 잡는 순간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나는 그놈에게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놈은 내 팔을 강하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병원에 가자.”
그놈이 나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는 안 돼. 죽을 때까지 네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그러니 아이만은 안 돼.”
그러나, 그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밀었지만, 그놈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악, 왜 이래. 그만 좀 해!”
깜짝 놀란 그놈이 나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인생도 끝이 났다. 구급차 안에서 빌고 또 빌었다. 천사가 있다면, 제발 아이만은 지켜달라고,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멀어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면서, 계속해서 빌었다. 그리고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작고 투명하지만 하얗게 빛나던 수호천사를 보았다.

***

나를 본 그놈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럼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하지 마.”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어?”
분명히 봤어. 병원에서도 그랬고.”
병원에는 내가 부탁했어. 안 그럼 네가 아이를 죽일 거 같아서.”
나는 곁눈질로 살짝 열려있는 문틈을 바라보았다. 옅은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걸 보니 그놈의 신부가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해. 악마 같은 자식하고 결혼하기 전에 떼어놔 줬으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웃음에 무슨 오해를 한 건지, “그래. 아니지. 아니잖아.”라며, 그놈은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타이밍에 맞춰서 나는 악을 쓰며 아이를 꽉 안고 등을 돌렸다.

“안 돼! 또 죽이려고? 한 번이면 됐잖아.”
나는 빽빽 울어대는 아이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바르르 몸을 떨었다. 수개월간의 연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너 결혼 전에 아이 얼굴 한번 보여주고 싶어서 왔을 뿐이야. 너한테 바라는 거 하나도 없어. 죽은 듯이 살 테니까, 제발 우리 좀 놔둬.”

"뭐?"

그놈이 황당해하는 모습을 보니 아이가 죽은 이후 더는 나오지 않던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그놈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더 크게 울었다. 그놈의 신부가 들을 수 있도록. 더 크게. 더 처절하게.

"그만!"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옅게 흐느끼는 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만, 그만해. 이제 다 그만하자.”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새하얀 드레스.

수호천사였다.

구급차에서 봤던 작고 투명하지만 하얗게 빛나던 수호천사. 하지만, 내 수호천사는 아니었다. 우리 아이, 아니, 내 아이의 수호천사였다.
그놈의 신부가 흐느낀다. 볼을 타고 흐르는 검은 눈물이 새하얀 신발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그만하자. 오빠.”
“아니야. 오해야. 내가 말했잖아.”
경악에 찬 그놈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간질였다. 드디어 그놈에게 지옥을 선물했다. 내가 느꼈던 그 끔찍했던 지옥을, 내 아이가 받았던 그 끔찍했던 상처를, 나는 그대로 돌려줬다.


드디어 복수는 끝이 났다.

***

“왜? 이번에는 네가 복수하려고?”
“너 진짜 많이 변했구나.”
거뭇거뭇 돋아나는 수염을 거칠게 매만지며 그놈이 다가왔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예전에는 착하고 조용한 여자였는데.”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착하고 조용한 여자. 그놈이 원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서 나는 피나는 노력을 했다. 먹기 싫어도 먹었고, 입기 싫어도 입었으며, 가기 싫어도 갔었다. 내 모든 삶은 그놈을 위해 맞춰져 있었다.

네가 아이를 죽였던 그 순간, 그 순진하고 멍청했던 여자는 죽었어.”
그놈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아이는 거짓말이었구나. 차라리 사실이었으면. 아니다. 그런데 너,  너무 잔인했어.”
잔인하다고? 아이가 죽었는데, 잔인하다고. 나는 그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 때는 내 목숨보다 사랑했던 그놈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는 더 당해야 해.”
악에 받쳐서 소리치는 내 말에 그놈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떨군다.
“도대체 뭘 어떻게 더 할 생각인데? 나는 이미 모든 걸 잃었어. 고통받을 만큼 받았다고. 그리고 아이가 죽었을 때, 나도 너만큼은 아니더라도 힘들었어.

그놈의 이마에 깊은 내천자가 새겨진다. 그놈의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놈은 진짜 아파 보였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웃기지 마. 너는 쓰러진 나를 두고 그냥 가버렸잖아.”

“무슨 소리야. 네가 수술하는 동안 밖에서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너마저 잘못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래, 이미 지나간 일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뭐?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너는 아이를 지우려고 억지로 나를 끌고 갔어.”

그래. 놈은 아이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때는 그냥 당황했을 뿐이야. 병원에 가서 진짜 임신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네가 테스트기로만 했다고 했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너, 너는 또, 내 곁을 떠났잖아.”

내가 왜 말을 버벅거리는지 모르겠다. 내 말에 그놈이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리고 할 말을 잃은 듯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대답했다.

“네가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잖아.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 결혼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나도 무서웠어. 지금 내 결혼식 망쳤다고 너한테 복수하러 온 거 아니야. 내 죗값, 당시 네가 떠나라고 해도 끝까지 곁에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죗값. 솔직히 네가 가라고 해서 고마웠어. 그리고, 그리고 내 아이.”


남자는 점점 심해지는 여자의 집착이 두려웠다. 자신한테 모든 걸 맞추던 여자는 남자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초조해했고, 불안에 떨었다. 여자는 병적으로 남자한테 집착했다. 그래서 여자가 떠나라고 했을 때, 남자는 그런 기회를 준 죽은 아이에게 고마웠다. 그게 남자의 죄였다.


“벌은 달게 받을 생각이야. 그러니 이제 우리 그만하자.”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끝내자는 그놈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끝내? 뭘 끝내. 나는 못 끝내.”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니? 어떻게 하면 끝내겠어? 너도 이제 그만 짐 내려놔도 되잖아.”
“짐? 짐이라고 했어? 우리 아이를? 아이 살려내. 그럼 끝낼 테니, 아이 살려내라고. 그전에는 절대 못 끝내. 너는 더 당해야 해. 지옥 같은 삶이 뭔지 너는 아직 몰라."
그놈과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놈이 던진 한마디 말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가증스러워.”
“... 뭐라고?”
“너 말이야, 가증스럽다고. 엄청난 모성애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잖아. 너 나한테 그랬지. 무책임하게 아이만 낳은 네 부모가 원망스럽다고. 차라리 낳지 말지 왜 낳아서 이런 끔찍한 삶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어? 너는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며. 그래서 피임도 네가 더 열심히 했고, 아이는 절대 없을 거라고 한 것도 너였어. 나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한 건 너였잖아."

아빠는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둘렀다. 아빠에게 있어서 폭력의 원인은 대부분 엄마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는 심한 의처증을 앓고 계셨다. 우체부를 통해 편지 한 통 받는 일 하나도 엄마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끝내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빠는 바로 따라갔다. 엄마는 매일 밤 너만 아니었으면 아버지와 헤어질 수 있었다고, 원망을 토해냈었다.

당시 갓 입사를 한 남자친구의 회사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직원들과 같이 퇴근하던 남자친구는 나를 보고 몹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남자친구 옆에서 누구 봐도 세련되고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누구야? 여자친구?" 남자친구는 잠깐 주춤하더니, 여자친구라고 대답했다. 다들 가볍게 인사하고 헤어진 후에 나는 남자친구에게 왜 대답하는데 주춤했냐고 따져 물었다. 당연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네 집착이 힘들다고 제발 그만하자고. 엄마가 늘 아빠에게 던진 말. "이제 그만하자." 나는 아이가 필요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아버지를 떠날 수가 없었다고 했었다.

잠시, 잠시만!

지금 내가 그놈을 잡기 위해서 아이를 가졌다는 말이야?

그런데 그놈은 기뻐하지 않았다. 아니, 아이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은 아이를 가진 나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
뭐? 무서웠다고?!
당시 아픈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을 때 그놈이 나를 안아 올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그를 밀쳐내고, 도망쳤다. 그리고 뛰고 또 뛰었다. 숨이 넘어갈 때까지 미친 듯이 뛰었다. 허벅지를 타고 뭔가가 흘러내리는 순간 뜀박질을 멈췄다. 나는 안도했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점점 다리의 힘이 풀려갔다. 쓰러지는 나를 잡기 위해 다가오는 그놈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아니야. 그놈이 도망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 못해.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을 거야. 나는 그놈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었다.


***

방 안에 물끄러미 앉아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안에는 언제나처럼 내가 선택한 악마가 있었다. 그런데 문득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악마인지 궁금해졌다.
“너는 뭐지?
[너는 내가 뭐라고 생각해?]
“천사를 버리고 선택한 악마지.”
[그래. 그럼 나는 악마겠지. 그런데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어. 너는 나를 버리지 않았어. 그리고 나 역시 너를 버리지 않았고.]
“무슨 말이야? 나는 천사를 버렸고, 널 선택했어.”
[그러니까 너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거울 속 악마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내가 너를 선택했다고 비웃는 거야?”
[비웃지 않아. 너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으니까.]
“꼭 본인이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우스워라."

흩어지는 악마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면서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악마가 뭐라고 하는데. 들어야 할 거 같은데. 감기는 눈을 잡아 올릴 수 없다. 나는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네가 간절히 원하는 건 모든지 들어줄 거야. 네가 복수를 원했으니, 복수를 도와줬을 뿐이야. 천사든 악마든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사람들이 자기 입맛대로 부르는 거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네가 나를 천사로 부를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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