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다서영 Dec 10. 2023

천사? 악마? 당신의 선택은?

짧은 이야기(소설)

낮에는 붉은 달이 밤에는 푸른 달이 뜨는 설산이 가득한 대륙.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는 이 대륙에 눈부신 은발과 은안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있었다. 설산과 함께 태어났다는 전설답게 이들은 감정 없는 얼음 인형처럼 보였지만, 대신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을 다스리는 힘.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바람의 기운을 느꼈고, 땅을 움직였으며, 물과 불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중 다른 종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힘이었다.


그래서 다른 종족들은 이들을 경외하면서도, 두려워했다.


***


어느 작은 술집 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다.

"그래서 스톤가의 둘째 딸만 살았다는 거야? 외눈박이 괴물들이 공격했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외눈박이 괴물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

"당연하지. 인간의 정기를 먹고사는 괴물을 어떻게 이길 수 있나. 칼을 들이밀기도 전에 기가 빨려 죽을걸?"

"맞아. 하지만, 스톤가의 둘째 딸은 괴물을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거지."

"그러니까 어떻게?"

"지금 우리 대륙에는 외눈박이 괴물이 보기만 해도 도망가는 종족이 딱 하나 있지 않은가?"

"아. 은안의 천사?"

천사라는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사람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천사는 무슨 그들은 악마야."

"잠깐만. 그래서 네 말은 천사든 악마든 지금 스톤가의 둘째 딸을 살린 게 은안이라는 거야?"

"그렇다네. 외눈박이 괴물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죽일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은안의 청년이 딱 스톤가의 둘째 딸이 죽기 직전에 나타났다고 하더군. 그리고 스톤가에 쳐들어왔던 괴물들을 모조리 말살시켰다는 거야."

"아니, 진짜인가? 은안이 사람을 구했다고? 그들에게도 감정이 있다고?"

"세상일에는 일절 관심도 없고, 관여도 안 하는 은안이 한 인간을 위해서 움직였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천사라는 말에 입을 삐죽였던 사람이 흥분해서 말했다.

"그래서 악마라는 거야. 어떻게 딱 둘째 딸만 살릴 수 있는 거지? 그 둘째 딸은 자신의 눈앞에서 가족이 모두 죽었는데,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걸세. 은안의 악마는 구원을 한 것이 아니라 스톤가의 둘째 딸에게 지옥을 선사했어."

그 순간, 옆 테이블에서 망토를 푹 눌러쓴 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남자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옅은 회색 눈동자가 기이하게 반짝거린다.


***


짙은 회색의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젊은 남자가 쿵쾅거리며 뛰고 있는 심장을 조심스럽게 눌렀다.

"스승님, 저는 우리 종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최하층으로 다른 종족들의 조롱거리로 살 수는 없습니다."

남자는 결의찬 눈빛으로 은발의 은안을 가진 갓난아기를 품에 안았다. 하지만, 아이를 품에 앉자마자 남자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하지만, 진짜로 가능한 일일까요?"

옅은 회색의 수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중년의 남자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톤가가 외눈박이 괴물한테 공격받을 때, 은안의 도움으로 딱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는 말을 듣고 바로 조사에 착수했지. 알아보니, 스톤가에서 오래전에 은안의 아이를 잠시 맡았던 적이 있다더군. 당시 스톤가의 사람들은 은안의 아이를 두려워해서 가까이하지 않았어. 그들은 은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두려웠을 거야. 하지만, 유일하게 딱 한 사람. 스톤가의 둘째 딸만 은안의 아이와 어울렸다고 하더군.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은안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말이군요."

"그래. 누군가를 구하다니, 우리가 알고 있는 은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야. 그들에게는 죽음도 그저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들은 절대 인간의 죽음에 관여하지 않아. 하지만, 은안의 청년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잘해줬던 인간을 죽음에서 구했어."

"그 말은 은안을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키우면..."

"우리 종족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럼 우리의 위상도 높아지겠군요. 은안의 도움을 받는 종족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어. 절대 은안을 잘 알고 있는 곳에서 키우면 안 돼. 인적이 드문 작은 산골 마을, 그래, 그런 곳이 좋겠어. 은안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자라게 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잘 알겠습니다."

남자는 아이를 품에 안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


어느 작은 산골 마을, 회색의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마을에 은발과 은안을 가진 아이가 살기 시작했다.

"마리도 우리와 같은 종족인데, 단지 돌연변이로 색이 변한 거라고 했어."

"색만 변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마리는 잘 웃지도 않고, 말도 잘 안 하고. 머리가 이상한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마리가 얼마나 똑똑한데.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마리와 자매처럼 살고 있는 소피는 마리를 향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동네 친구들을 향해 주먹을 흔들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지. 가자, 마리야." 소피는 마리를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소피는 마리의 은발과 은안을 사랑했다. 회색은 차별의 상징이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 소피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오래전에는, 회색 종족도 대륙에서 대접을 받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종족들이 하지 않은 더럽고 힘든 일은 모두 회색 종족이 하고 있었다. 심지어 회색 종족은 입는 것, 먹는 것, 사는 것조차 차별받고 있었다.

"와. 이 옷 예쁘다."

소피가 옅은 하늘색 드레스를 만지작 거리자, 재빠르게 다가온 점원이 옷을 낚아채며 말했다.

"당신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에요."

"제가 입을 거 아니에요. 우리 마리가 입을 거라고요."

소피는 입을 삐죽이며 옷을 다시 빼앗아서는 옆에 있는 마리에게 대 보았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소피는 아린 마음을 간신히 추스른 채, 오랫동안 조금씩 모아 왔던 돈으로 옷을 계산했다. 옷가게를 나온 소피는 마리를 데리고 어느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마리야, 사람들 오는지 잘 봐. 나 옷 좀 갈아입게."

소피는 조금 전에 산 하늘색 드레스를 꺼내서는 재빠르게 갈아입었다. 그리고 곧 만날 사람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예쁘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옷을 다 갈아입은 소피는 스카프 하나를 꺼내서는 머리를 감쌌다.

"마리야, 먼저 집에 가 있어. 나는 어디 좀 들렸다가 갈 거야. 바로 집으로 가야 해."

마리가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본 소피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허름한 책방 앞에 선 소피는 큰 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괜찮아. 괜찮아. 소피야, 너는 할 수 있어."

용기를 낸 소피가 조심스럽게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딸랑 종소리가 울린다. 책방 안쪽으로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소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갔다. 남자의 실루엣이 점점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시나요?"

친절한 남자의 목소리에 소피의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소피는 남자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좋았다. 회색의 자신을 밀어내지 않고 따듯한 미소를 지어주는 모습도 좋았다. 오랜 짝사랑이었다. 이제는 짝사랑을 끝내고 싶었다. 소피에게 있어서 남자는 차별의 세상에서 자신을 끌어올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소피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가린 스카프를 내렸다. 그리고 한 템포 쉰 다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당신을 좋아해요."

소피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뭐라고요?"

남자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종족은 정말 분수를 모르는군요. 신고하기 전에 당장 나가세요."

소피는 당황해서 눈만 깜박였다. 남자의 표정이 점점 사납게 일그러진다.

"당장 내 책방에서 꺼지라고! 감히 누구를 좋아한다고?! "

남자는 소피를 사납게 밀어냈다. 남자의 힘에 밀려서 넘어진 소피를 향해 남자는 침을 뱉으며 말했다.

"안 그대로 책이 안 팔려서 너 같은 것들한테도 웃어야 하는 내가 한심해 미칠 지경인데, 당장 꺼져! "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꽃밭이었던 소피의 세상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


마을 곳곳에 널 부러져 있는 시체를 보며 짙은 회색의 머리를 풀어헤친 한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왜! 왜 그랬습니까? 이들은 당신의 가족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이렇게 비참한 꼴로 죽어야 합니까? 이들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남자의 울부짖음에 이제 막 어린 티를 벗어나기 시작한 은안의 소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맞아요. 이들은 내 가족이에요. 나는 이들을 사랑해요. 이들의 웃음도 눈물도, 희망도 절망도 그리고 기쁨도 괴로움도 모든 것을 사랑해요."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들을 죽이신 겁니까?"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


"죽고 싶어."

남자를 만나고 온 날, 소피는 마리를 향해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이후, 소피는 웃음을 잃었다. 말도 하지 않았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 그저 되뇌었다. "죽고 싶어."

그런 소피를 보며, 소피 엄마는 말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회색이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는 바꿀 수 없어. 그러니 포기해."

어느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고 돌아온 소피 엄마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일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감자, 고구마 외에는 먹을 수도 없었다. 소피 엄마는 어렸을 때 우연히 맛봤던 달콤한 케이크 맛을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먹을 수 없었다. 그냥 먹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먹지 못했다.

"나야 말로 죽고 싶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회색이 아닌 종족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소피 엄마는 소피를 향해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소피의 오빠는 곧 있을 괴물 소탕 작전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걸 듣고는 머리를 부여잡고 통곡했다.

"괴물 소탕이라니. 분명히 우리를 제일 앞으로 보낼 거야. 그럼 사지가 뜯긴 채로 죽을 수도 있어. 싫어. 절대 싫어. 나야말로 죽고 싶다고!"


작은 산골 마을, 매일같이 울려 퍼지는 "죽고 싶다.", "살고 싶지 않아.", "힘들어, 괴로워."란 말을 들으며, 마리는 이들에게 줄 선물을 결정했다.


"나는 당신들을 사랑하니까, 당신들이 가장 원하는 소원을 선물로 줄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