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5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2년반동안 석사학위를 했다. 석사 2년차시절에 한국에 있는 여친이 일본에 있는 나를 보러 왔다.
차를 운전해서 공항으로 여친을 마중나갔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여친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일본의 풍경이 신기했는지 열심히 밖을 관찰했다. 그러더니 지나가는 어떤 차 한대를 보고 저 차는 기선이를 닮았다고 했다.
우리는 학교앞에 벤또맨이라는 도시락집에 갔다. 자주가는 가게라서 내 얼굴을 알고 있는 일본 주인 아주머니는 나랑 여친을 번갈아 보더니 ‘맨날 혼자 오던 니가 드디어 여친이 생겼구나.'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도시락 주문을 받았다. 이미 사귄지 3년이 되가는데, 단지 롱디를 했을뿐인데 약간 억울했다.
교회의 자매 하나가 본인이 다니고 있는 슈쿠토쿠 대학의 기숙사에 여친이 묵을 방을 잡아줬다. 그 기숙사에는 아는 교회자매들이 많았는데 눈치들이 없는건지 아니면 약을 올리는건지 계속 번갈아가며 우리둘이 있는 방에 놀러왔다.
다음날 아침에 나는 학교를 가야 해서 여친을 기숙사에 두고 나왔다. 기숙사 건물밖에서 뒤를 돌아보니 여친이 창문에서 내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나고야 대학은 히가시야마 공원이라는 동물원에 인접해 있었다. 나고야 대학에서 히가시야마 공원까지는 아주 가파른 내리막길이 있었는데 실험실에서 퇴근하고서 그 내리막길을 엄청난 속도로 자전거를 타고 내려갔다. 어지간히 신이 났었나 보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나없는 동안 뭐했냐고 물었다. 근처에 있는 자동차매장에 가서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자동차를 타봤다고 했다. 세일즈맨이 옆에서 엄청나게 설명을 했을텐데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오는가 싶었다.
그로부터 몇달후에 나는 여친과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양가에서 하룻밤씩을 보낸 후 일본에 같이 왔다. 우리는 카구야마라고 하는 나고야 외곽의 신도시에서 살게 됐다. 신혼집을 처음보고 생각보다 집이 예쁘다고 여친은 신이 났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회에서 해야할 봉사활동이 있어서 여친을 집에 두고 교회에서 일을 했다.
밤늦게 집에 와보니 여친은 옷장에 있는 내 옷들을 꺼내서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처음 들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이제 내 여친이 아니라 내 아내구나라는 생각. 그렇게 내 여친은 내 아내가 되었다.
옛날 아날로그 사진들을 정리하다 갑자기 그 시절 생각이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