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하는 이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엄마와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하나 싶었다.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 대부분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엄마와는 관계는 왜 이렇게 애증인 건지.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늘 혼자 살라고 했었다. 능력 있으면 혼자 살라고. 나는 학구적이거나 예술적인 직업을 꿈꿔왔는데, 엄마는 코웃음 치며 전문직을 강요했다. 전문직이면 능력이 보장되고 능력이 있으면 혼자 살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 능력이라 함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고민 없이 먹고 길 가다가 목마르면 맛있는 음료수를 사 먹을 수 있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경제적인 여유를 뜻한달까. 결혼을 안 하니 아이도 당연히 없이 살라는 뜻이었다. 결혼하지 말고 아이 없이 혼자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라고 했었다.
엄마는 늘 힘들어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본인의 아이인 나에게는 아이 없이 살라 했던 엄마의 말이 지금 생각해 봐도 왜 이리 아픈지 모르겠다. 엄마에게 나는 너무 힘든 존재였다. 초등학생 정도였을까, 연속되는 기억이 생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으니까, 그때에도 저런 말을 들어왔으니까, 초등학생인 나에게도 엄마는 아빠와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 보였고 할머니와의 관계에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처럼 보였다.
말로 꺼낸 적은 없지만 엄마와 아빠는 서로 사랑하지 않다고 느꼈고, 처음에는 연애결혼이 아닌 중매결혼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는 혼기가 차 어쩔 수 없이 중매결혼을 했고 다들 아이를 낳으니까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목해 보이는 가정에서 태어난 친구들이 부러웠다. 엄마 아빠의 데이트 이야기나 엄마 아빠가 주고받은 닭살이 돋는 멘트를 거리낌 없이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제일 충격적이었던 건 한 친구가 초경을 시작하자 가족들이 다 같이 케이크에 초를 켜고 축하해 줬다는 거다. 엄마에게 금목걸이를 선물을 받은 친구가 하는 자랑이 어찌나 충격적이고 부러웠던지. 나의 초경은 엄마에게 불안과 걱정의 요인이었을 뿐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한 번도 애정이 어린 시선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고 말투도 공격적인 데다가 부모 사이에 사랑한다는 말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중매결혼이긴 하지만 나름의 연애 기간도 거쳤다는 것은 한참 뒤에 이모에게 들었다. 이모들은 신기하게도 형부인 우리 아빠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다.)
그런 엄마의 행복 결핍들이 나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것은 뭐 말할 것도 없다. 본인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옥죄어왔다. 저녁 먹을 시간 대략 저녁 6시쯤이면 꼭 집에 있어야 하고 친구 생활, 옷차림, 공부에 대해 간섭하고 강요했다. 사춘기 시절이니 그 간섭이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 엄마와의 마찰이 매우 잦았다. 엄마가 너무 미웠고 자주 죽고 싶었다.
지금은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엄마가 오히려 너무 갸륵하고 엄마에게 너무 미안할 뿐이다. 방식은 물론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엄마도 정말 힘들었겠다고 생각하고 어쩔 땐 엄마 뜻대로 살아주지 못해서 미안한 맘이 든다. 정말 애증이다. 그 당시에는 어쨌든 엄마와 떨어지고 싶었다. 대학은 꼭 집을 떠나 서울로 가고 싶었다.
마음에 맺힌 엄마와의 대화가 하나가 있다. 엄마가 점을 보고 왔는데 자식복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자식이 먼저 죽거나 그런 게 아니라 자식이 부모의 품을 일찍 떠나 독립하는 것도 자식복이 없다고 표현을 했었나 보다. 아직도 그 말이 너무 아프다.
그래도 떨어져 살고 나서는 사이가 그럭저럭 좋아졌다. 엄마도 많이 바뀌었다. 물론 대판 싸운 적도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제는 떨어진 지 10년이 훌쩍 넘다 보니 나를 한 발짝 떨어져서 봐주는 것 같았다. 심지어 몇 년 전에는 그래도 둘이 사는 게 낫다며 짝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까지 했다.
엄마에게 느끼는 감정은 참 복잡 그 자체이다.
성인의 연애에 있어서도 꽤 보수적이었던 엄마를 알기 때문에 남자 친구의 존재를 밝히는 것도 항상 조심스러웠다. 무서웠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엄마에게 늘 혼날까 봐 무서운 감정이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다른 친구들이 엄마와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면 너무 낯설고 부러웠다. 난 항상 숨기기 급급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남자 친구의 존재도 겨우 알렸다. 엄마에게 운을 띄우기도 전부터 심장이 떨리고 손에 땀이 났다. 이렇게 살아오다 보니 동거한다고 솔직히 말하기가 무서워 아직 말하지 못했다.
사실 꼭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엄마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찜찜함이 있는 것도 맞다. 존재를 알렸으니 이제 얼굴부터 천천히 보이려 하는 중이다.
나는 엄마가 아니고 내가 만나는 사람도 아빠와 같지 않다. 내가 몰랐던 엄마와 아빠의 관계에 대해 예단할 필요가 없고 그들의 행복에 내가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것도 내 탓은 아니다. (사실 아빠의 이야기는 할 것도 없다. 오로지 할머니 걱정뿐이며 가정에 무심했던 아빠에게는 애초에 애정도 별로 없기 때문에.)
물론 엄마가 아프지 않고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 행복이 나를 통해 얻는 게 아니라 엄마 스스로의 삶에서 얻었으면 좋겠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내가 지금 동반자를 만나 행복하고 둘이 살아서 좋기만 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