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몰라, '쾅'!" 싸울 건 싸워야지
아침에 눈을 떴더니 모처럼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상쾌했다. 베란다 창을 살짝 내다보니 햇살마저 찬란하다.완벽한 아침이랄까. 그렇다면 황급히 시계를 봐야 한다. 늦잠을 잤다는 뜻이니까.
벽시계는 오전 8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이맘때쯤 가족들은 쌀밥이든 토스트든 한 입 '와앙-' 베어 물 시간이다. 그럴 시간에 내가 눈을 떴다는 건 온가족이 늦잠을 잤다는 뜻.
나는 벌떡 튀어올랐다. 냉장고로 달려가서 버터 한 조각에 계란 4개를 꺼내와 프라이팬부터 달궜다. 팬에 버터를 던진 뒤, 계란물을 빠르게 저었다. 냉동실에서 갓 꺼낸 식빵은 계란물 속에 꾹꾹 눌러 담갔다가 팬에 올렸다. 꽁꽁 언 식빵은 꾹꾹 눌러야 계란물이 더 빠르게 스미니까.
'챙챙챙챙' 스테인리스 볼 안에서 계란물 부딪히는 소리가 나니 남편도 잠이 깼다. "헙! 늦잠 잤다!!!" 침실에서 남편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침실에서 주섬주섬 외출복을 입고 나오는 사이, 프렌치 토스트는 벌써 3조각이나 만들어져 식탁 위에 올라 있었다.
나는 남은 식빵을 마저 더 구워서 토스트 7조각을 만들어 놓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큰 아이는 벌써 옷을 다 입었고, 어린 둘째는 남편이 옷을 입혀주고 있었다. 접시를 보니 토스트는 달랑 1조각 남아있었다.
이제 내 옷만 다 입으면 아침 준비는 끝나는 것이다. 서둘러 옷을 입고 나오니 첫째는 학교에 갔다. 이제 둘째만 어린이집에 보내면 된다. 선크림을 바르고 젖은 머리는 풀어 헤치고 둘째 아이와 함께 현관문을 나섰다.
남편은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사이, 세수도 못했다. 나라면 집에 남을 것 같은데 남편은 우리와 함께 현관문을 나서 운전석에 앉았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어린이집에 도착한 뒤, 우리는 아이와 정겹게 인사를 나눴다. 이따 만나자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홀가분했다.
아침도 거르지 않았고, 아무도 지각하지 않았다. 비록 늦잠은 잤지만 무사히 아침을 보낸 것 같다. 심지어, 어쩌면 남편과 카페 데이트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도 약간 차올랐다.
차는 천천히 지하주차장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어린이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남편에게 어딜 가자고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앞서서 떨어진 인도에 경비원 아저씨가 보였다. 대각선 방향으로 걸으며 도로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분명, 길을 건너려고 할 것 같았다.
나 : 여보, 저기 인도에 사람 있어.
남편 : 그래?...
차는 20km 정도로 서행하고 있었다.
나 : ... (왜 속도를 줄이지 않지? 건널 것 같은데...)
예상대로 경비원 아저씨는 한 발을 도로 쪽으로 옮겼고, 남편이 운전하던 차와 긴장감있게 마주쳤다. 남편은 놀란듯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경비원 아저씨는 유유히 길을 건넜고 우리 둘의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 : 여보 내가 아까 저기 사람 있다고 했는데 당신 혹시 못봤어?
남편 : 나? 봤어, 봤어! 봤지 나도.
나 : 그런데 왜 미리 속도를 안 줄여~? 위험하잖아. 다음부턴 미리 미리 속도를 좀 줄여~!
남편 : 아니, 내가 얼마나 빨리 달렸다고 그래. 안그래도 천천히 가고 있는데 뭘 더 줄여?
나 : 천천히 갔다고 해도, 옆에 가던 사람이 건널 것 같으면 미리서부터 속도를 줄여야지. 20km면 느리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사람을 쳐도 되는 속도는 아니잖아.
남편 : 무슨 내가 사람을 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난 이쪽으로 건널 지 몰랐지!
나 : 아까 내가 말해 줬잖아 사람 있다고. 우리 쪽으로 대각선으로 오고 있었어. 봤다며. 그런데 어떻게 그걸 몰라?
남편 : 아, 나는 그건 못 봤어! 운전자가 전방주시 하는 거 몰라? 그 사람은 옆에 있었고~! 내가 옆에 못 보는게 당연한거지. 왜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래?
나 : 단지에서 천천히 가라는 이유가 뭔데. 사람이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니까 앞도 보고 옆도 보고 하면서 조심조심 가라고 천천히 가는거잖아. 그런데 전방주시하느라 그렇다고 하면 어떡해? 그건 더 위험하잖아~
남편 : 아니, 왜 나한테 짜증이야? 당신 힘들까봐 내가 운전해 주려고 같이 따라나온건데. 나한테 이래야돼? 당신이 운전할 줄 아니까 지금 나한테 더 이러는거야~! 아무 문제 없는걸 괜히. 조수석에 앉으면 더 위험해 보이는 거라고!
나 : 당신이 운전해줘서 고마운 것보다, 위험하게 다니다가 사고나면 안 되잖아. 내가 당신한테 짜증 내려고 하는게 아니라. 당신이 계속 핑계만 대니까 그렇지. 그냥 '알았어 다음엔 더 조심해야겠다'하면 되는거잖아. 아니면 '내가 오늘따라 피곤해서 잘 못 본것 같다. 다음엔 조심하겠다'든가. 그런데 계속 '몰랐다, 아니다' 하면서 계속 방어적으로만 이야기하니까 그렇지.
남편 : 아, 나 몰라! 당신 위해서 지금 씻지도 못하고, 피곤한데도 따라 나와서 운전해 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네. 당신 혼자 운전해서 가. 난 집까지 걸어갈래. '쾅!'
남편은 그렇게 차 문을 닫고 터벅터벅 걸어가 버렸다. 나는 이 일이 이렇게까지 될 일인가 자문하면서 묵묵히 어린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을 고르면서 내 마음도 골랐다.
'혹시, 본인도 놀랐는데, 내가 다독여주길 바랐던 걸까?'
'너무 핀잔주듯이 말했나?'
'운전하는데 옆에서 성가시게 잔소리 하는 것처럼 굴어서 기분이 상했나'
'아침에 씻지도 못할 정도로 바쁘게 따라 나왔는데, 내가 그런 남편의 컨디션을 너무 몰라준걸까?'
오늘 아침을 좋게 마무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려서 난감했고 속상했다. 책 대여를 다 끝내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남편이 혹시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남편은 없었다. 쓸쓸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빨리 화해하고 싶었다.
"여보, 오늘 애들 책 좋은거 많이 빌려왔어. 한 번 볼래?"
집에 도착하자마자 밝게 한 마디 건넸다. 남편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대꾸했다.
남편 "그렇게 나 가고 나서 당신이 나한테 다시 돌아오라고 전화할 줄 알았는데 안했더라. 그런데 집에 와 보니까 당신 폰이 집에 있는거야. 그리고 샤워하면서 생각도 좀 정리가 되더라고. 아까는 미안해."
"나도 미안해. 내가 너무 핀잔 주듯이 말한 것 같아. 나도 사실 주차장으로 걸어오면서 당신이 차 앞에 서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없는거 보니까 허전하더라. 우리 그냥 화해하고 오전에 기분 좋게 시간 보내자"
남편 "나 사실은 아까 좀 놀랐어. 그때 그 아저씨가 그쪽으로 건널지 정말 몰랐거든. 그런데 당신이 나를 걱정해주기 보다는 오히려 뭐라고 하니까 기분이 상했던 것 같아. 난 당신이 놀랄 때 항상 위로해 주잖아"
"그래? 나는 당신이 그정도로 놀랐을 줄 몰랐어. 그런데 내가 미리 사람 온다고 말도 해줬었고, 급브레이크도 그렇게 세게 밟은 것도 아니었잖아."
남편 "아니야. 내 딴엔 세게 밟은 거였어. 그리고 사실, 자존심도 좀 상했어. 당신 앞에서 멋있어 보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속상했어.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운전 잘 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도 좀 있거든. 그런데 내가 너무 운전을 못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니까 자존심 상하더라"
"같이 산 지 10년이 지난 여자한테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들어? 당신 운전 못한다고 하려던 건 아니야. 오히려 내가 더 운전을 못하지. 그러니까 나는 더 천천히 다니고, 안전하려고 노력하고. 당신은 나보다 운전을 잘 하니까 어려운 길도 잘 다니잖아. 속도 내서도 나보다 더 잘 다니고"
내가 더 운전을 못한다고 말하는데, 남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기분이 아주 묘하다.
"그런데, 난 우리 관계에 당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줬으면 하는 부분도 있어. 예를 들어서 오늘처럼, 이런 다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고 이야기를 꺼내는데. 당신은 차 문 쾅 닫고 가버린 일에 대해서는 나한테 먼저 이야기 꺼내고 풀어보려고 하지 않더라. 난 그 부분은 당신이 먼저 이야기해주길 기다렸어. 내가 말 꺼내지 않더라도. 그래서 아까 당신 보자마자 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계속 기다렸던거야. 앞으로는 당신도 먼저 대화하려고 노력해줄 수 있어?"
남편 "그래. 그건 나도 미안해. 그나저나 우리 결혼기념일 벌써 10주년이다. 얼마 안 남았어. 당신 뭐 갖고 싶은 건 없어?"
"나? 난 요즘 물건 사는게 다 재미가 없어."
남편 "이런 가방은? 아니면 팔찌는? 시계는 별로야?"
"그런거 사 봤자 차고 어디 나갈데도 없다. 금방 낡고, 쓰레기 되고. 허무하더라고. 잠깐씩 뭐가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돌아서면 갖고 싶다는 생각도 잊어버려. 물욕이 없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내가 진짜 바라는건 하나 있어"
남편 "뭔데?"
"우리 제발 자존심 부리면서 시간 낭비하지 말자. 내가 요즘 가장 바라는 건 딱 그거야. 당신이 자존심 부리느라 계속 '아니다, 난 몰랐다'하면 나는 나대로 내 말이 맞다고 우기고 싶어져. 그러면 싸움이 길어지는 것 같더라.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그냥 우리 앞으로는 사소한 일은, 사소한 일일 때 바로바로 인정하고 가볍게 지나가자. 싸우다가 일 커지고나서 인정하는 건 더 힘들잖아. 우리 싸우는 건 다 사소한 일 때문인데. 작은 일에 목숨걸고 아니라고 매달리고, 모른다고 하지말고. 아무리 10년을 같이 살았어도 당신이랑 내가 생각이 같을 순 없어. 우린 달라. 그러니까 고쳐줬으면 하는 부분도 생기겠지. 서로 달라서 생기는 문제인데 무조건 다 아니라고만 하면 어떻게 대화가 되겠어."
"그러니까 상대방이 고쳐달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볍게 인정하고, 만약에 고쳐달라고 이야기하는 말투가 듣기에 기분이 나쁘면 그냥 바로 이야기 해. 당신이 내 말투가 별로고, 기분이 안 좋다고 하면 나도 바로 사과하고 고칠게."
남편 "그래. 그러면 되겠다. 앞으로는 그렇게 해볼게"
"근데 당신. 진짜 웃긴거 알아? 그냥 무조건 나 이기려고만 하는 남동생 같아. 맨날 내 말에 무조건 '아니, 아니, 아니, 아니'만 하다가 결국엔 '응'이 되어버리는 그런 남동생."
남편은 또 "아니거든?" 하고 되받아 친다. 이 웬수를 어쩌지도 못하고. 여기에 박제라도 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