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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생 Sep 26. 2022

결혼 생활 10년,가전도 늙는다

밤 11시 넘어 오븐 청소를 한 이유

결혼 생활 10년차가 되니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바로, 가전제품들이 노후화 됐다는것. 그말인 즉슨, 앞으로 목돈 나갈 일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신혼 살림으로 구입했던 것 중에 가장 잘 산 것을 꼽으라면 바로 냉장고였는데. 그 당시 전지현이 티비 광고에 수시로 나와서 ‘먹고, 살고, 사랑하고’를 속삭였다.


신혼을 앞둔 새댁에게 그 광고 카피는 마음을 울리는 명대사 같았다. 쳐다보기만 해도 설렜던 전지현 냉장고는 그렇게 내 신혼 살림살이로 낙점됐다.


주방을 묵묵히 지키던 냉장고는 지난 9월초, 갑자기 고장이 나고 말았다. 추측하기로는 이사를 한 번 거치면서 냉장고 이전 설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9월이지만 한여름과 같은 무더위가 계속 되었다. AS센터에서 서비스 받으려면 보름은 기다려야 된다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할부로 급하게 냉장고를 샀다.


새 냉장고가 생겨서 오히려 좋은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절대 새 냉장고에 만족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단, 혼수 가전으로 들인 냉장고는 그 당시 가장 좋은 것으로 고르고 골라 구입했다. 결혼할 돈이 있는 상태에서 엄선한 것이니 그 냉장고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을까. 그동안 쌓인 살림 습관이나, 오래오래 잘 쓰려고 공들인 정은 또 어떻고.


새로 산 냉장고는 좋아 보인다. 그치만 그 때  900리터 대용량 냉장고 보다 용량은 더 줄어서 875리터로 내부 공간이 좁아졌다. 널찍한 냉장고 수납 공간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오히려 조금 불편했다.


새 냉장고는 급하게 알아본 탓에 나의 까다로운 선택망도 피해갔다. 그저 빨리 배송받을 수 있으면서, 기능이 그리 빠지지 않기만 하면 됐다.


예산은 또 어떤가. 갑자기 고장난 냉장고 때문에 다른 목적으로 모아둔 돈을 쓰긴 싫고. 이제는 아이도 둘이고 돈 나갈 곳도 많은데 그 때 냉장고만큼 티비 광고에 나오는 좋은 냉장고를 살 수도 없다.


체감상 혼수 가전을 이길 수가 없다. 그런 아쉬운 마음으로 혼수 가전들을 보내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도 10년이라는 시간은 꽤 긴지라. 그런 아쉬움보다는 마냥 ‘새 것’에 대한 생각이 간절할 때가 더 많다.


일단 텔레비전이 그렇다. 내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집에 놀러온 친구 하나는 “티비가 왜 이렇게 크냐”고 했다.


또 티비에 어플을 다운받을 수 있는 스마트기능에, 세트로 구성된 안경을 쓰면 입체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최신 티비였다.


그때 그 멋진 티비는 이제 어디가서 명함도 못 내민다. 요즘 티비들은 거실 벽을 채울만큼 훨씬 크고 생생하다.


격세지감은 유행하는 가전 제품을 볼 때 크게 와 닿는 것 같다.


게다가 우리집 티비는 이제 멀쩡히 켜져 있다가도 갑자기 꺼지는 일이 더러 있다.


처음에는 누가 리모컨 잘못 건드렸냐며, 실수로 티비를 끈 범인(?)을 색출하려고 했다.


웃긴건 그때 다들 ‘일단 나는 아님!’이라는 눈빛을 하고 있었음에도 계속 범인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리모컨은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우리 부부는 그때 동시에 서로를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고장났구나…’


그래 그럴만도 하지. 벌써 10년인데 그럴 수 있지. 그러면서 아직도 티비를 바꾸지 않고 있다. 꺼지면 그냥 다시 켜면 되는걸 뭐. 티비는 그리 급하지 않다.


그렇다면 요즘들어 가장 바꾸는게 시급한 가전이 뭘까. 그건 아무래도 광파오븐 같다.


쓴지 너무 오래 되니, 이건 이상 없음과 고장 문제를 넘어서는 일이 됐다. 아무리 청소를 해도 오랜 시간에 거쳐 묵은 그을음과 때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오븐에 어디 고장난 곳은 없으니 ‘아직 이 정도면 쓸만 하다’ 싶기도 하고. 하지만 미심쩍다.


그래서 최근, 광파오븐을 쓸 때마다 뚜껑을 철저히 덮는 습관이 생겼다.


물 한 잔을 넣고 돌리더라도 뚜껑을 덮는다. 혹시라도 오븐 천장에서 오래된 재나, 열판 코팅 부스러기, 먼지 등이 떨어질까봐서.


오븐 청소를 할 때마다 보이는 구석의 그을음과 때를 보면 그냥 갈아 치우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그래서 요며칠, 남편에게 오븐 이야기를 자주 했다. 오늘 밤, 잠들기 직전에도 했다.


“광파오븐 너무 비싸더라 여보. 어쩜 그렇게 가격이 떨어지지도 않고. 요즘은 더 비싼 것 같아! 우리 그 당시 50만원 정도 줬잖아? 글쎄 가격대가 그대로더라. 그런데 미니 오븐은 가격이 좀 괜찮더라고?!”


“요즘 오븐에서 빵 굽기가 좀 꺼려져. 당신은 안그래? 여보, 우리 오븐 바꿀까?”


“앗 그런데 미니오븐 사려면 전자레인지 하나 따로 사야겠다. 미니오븐은 해동 기능이 없네…”


남편은 쇼핑 사이트를 뒤지는 내 옆에서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더니 말했다.


“우리 이번 달 카드값 얼마나 나왔지?”


날카롭게 파고드는 현실. 카드 명세서를 찾아 봤다. 지난번에 구입한 냉장고 할부 대금이 남아있었고, 남편이 다녀온 병원비가 할부로 남아있었다. 거기에 나름 아낀다고 아껴가며 산 생활비, 식비가 뒤엉켜 있었다.


몇날 며칠 뜨겁게, 새롭고 깨끗한 오븐을 향하던 내 열정이 그 항목들 덕분에 좀 미지근해졌다.


내 카드 내역을 듣고나서 남편이 말했다.


“여보 우리 이번에 블렌더도 사기로 했잖아. 일단 그럼  오늘은 사지 말고, 이번달 카드값 내고 나서 명세서 리셋되면 블렌더랑 오븐 같이 사자. 괜찮은거 좀 알아봐”


카드 내역을 듣고도 사지 말자고는 안하는 고맙고 신기한 남편이다.


“그럼…미니오븐 한 번 알아볼까?”


미니오븐은 광파오븐에 비하면 가격 부담이 덜하다.그래서 남편도 미니오븐을 반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미니오븐은 자주 고장난대. 나 아는 사람 와이프가 학교에서 방과후 수업으로 요리수업 하는데 미니오븐 많이 쓰는데 일년에 몇 대씩 고장나서 새로 산다고 하더라고. 우리 광파오븐 비싸도 하나 사서 10년 썼잖아. 그냥 괜찮은걸로 사서 오래 쓰자”


“음, 아무래도 그게 낫겠네. 어차피 미니오븐 사면 전자레인지 기능 필요해져서 두개 사야하는데. 두 개 살 가격이면 광파오븐 살 돈이나 뭐 비슷하긴 해”


“그럼 난 먼저 잘게”


남편은 대화를 마친 뒤, 괜찮아 보이는 광파 오븐 제품 링크를 내게 보내놓고 잠을 청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였다.


시간이 늦었는데도 오븐 청소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오븐에 미지근해진 열정을 청소가 좀 더 식혀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스팀 쫙쫙 쐬어주는 대단한 청소는 아니고, 깨끗한 젖은 행주로 여러번 닦아내 주는 정도의 관리다.


‘지금 청소해 보고, 그래도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 사자. 만약에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으면 사지 말아야지’


뜨거운 물로 행주를 적셔서 광파 오븐 내부를 여러번 닦고, 빨고 또 닦고를 반복했다.


남편도 아이들도 이웃들도 잠을 청하는 늦은 시각이라 냄새나는 식초를 풀어 쓰지도 않고 젖은 행주로만 닦았는데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다.


청소가 끝나고 방에 들어가보니 남편은 깨어 있었다. 내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들지 못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여보, 나 오븐 청소해봤는데 우리 오븐 사지 말자. 아직 쓰기 안나빠보여. 아까 당신이 링크보내준거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그거 사지마 여보. 좀 더 쓰고 사자”


그러고나서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자는 날이라, 아이방에 와서 누웠다. 이게 맞는거지. 카드 내역서 속 남편의 병원비 할부가 어른거렸다.


그런데 한참 뒤, 남편이 있는 안방에서 크게 한 번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의 한숨 한 번에 많은 생각이 든다. 그 한숨의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가전제품도 우리도 이제 슬슬 늙어가는건가. 저릿저릿하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막 결혼식을 마친 내게 말해주고 싶다.


“젊을 때,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로 고맙게 살아”

“10년 뒤에 가전제품들 한꺼번에 상태 메롱되니까, 적금 하나 들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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