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미덕을 선사하는 재즈 보컬리스트
음악가 : Diana Krall(다이애나 크롤)
음반명 : Turn Up The Quiet
발매일 : 2017.05.12.
수록곡
1. Like Someone In Love
2. Isn't It Romantic
3. L-O-V-E
4. Night And Day
5. I'm Confessin' (That I Love You)
6. Moonglow
7. Blue Skies
8. Sway
9. No Moon At All
10. Dream
11. I'll See You In My Dreams
'채움'이 미덕이 되는 세상이다. 학생이라면 모름지기 국어뿐 아니라 영어, 수학까지 능통해야 하는 세상, 취업준비생은 이력서에 자격증 하나라도 더 채워 넣어야 하는 세상, 완벽한 어머니가 완벽한 사회인으로 우뚝 서야 하는 세상. 햇살이 손등을 간질이는 봄날의 여유, 할 일 없이 침대 위에서 빈둥대는 일 따위 사치나 마찬가지다. 일정표를 하나라도 더 채우기에 급급한 세상에서 이 무슨 만행이란 말인가. 우리를 부추기는 세상은 말한다. "열정, 열정, 열정!" 그런데 여기, 채움이 아닌 '비움'의 미덕을 추구하는 음반이 있다. 재즈 보컬리스트 다이애나 크롤의 <Turn Up The Quiet>다.
사실 다이애나 크롤의 전작 <Wallflower>(2015)를 떠올리면 낯설지만은 않다. 이미 그가 고전 팝 넘버를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함으로써 과거로의 회귀를 선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음반의 아트워크만 보더라도 차이는 명확해진다. 11번째 정규 음반 <Glad Rag Doll>(2012)에서는 신체의 선을 강조하며 도발적 자태를 뽐낸 바 있는데, 이에 조응하듯 음악 또한 강렬한 리듬감을 위시한 곡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그렇다면 본 작품은 어떤가? 검정 드레스를 차려입은 다이애나 크롤에게선 과거의 열정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코 허전하진 않다. 뜨거움이 간 자리를 거장의 차분함이 메우고 있는 덕분이다.
음량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대중음악의 공식에 익숙한 청자라면 음반의 시작을 알리는 "Like Someone In Love"가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잔망스러운 베이스로 시작해 곡을 이끌어가는 악기의 구성이 너무나도 단출한 탓이다. 그러나 비움의 미학을 여과 없이 전달하는 밴드의 합은 음량이 채우지 못한 여백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기 시작한다. 바로 소리의 질감이다. 손으로 베이스 줄을 뜯는 피치카토 주법의 기분 좋은 탄현음, 섬세한 강약 조절이 돋보이는 피아노 등은 소규모 악기 편성이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중에서도 주인공은 단연코 다이애나 크롤의 목소리다. 허스키한 음색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Isn't It Romantic", 고백을 속삭이는 "I'm Confessin'(That I Love You)" 등은 그 매력을 극대화한 대표적 순간이다.
음반으로서의 완성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작은 진폭을 그리며 서행하는 와중에도 큰 그림을 놓치지 않으려 완급조절에 신경 쓴 흔적이 엿보인다. 냇 킹 콜(Nat King Cole)의 곡을 통통 튀는 매력으로 소화한 "L-O-V-E"에서 고요 속의 애달픔을 담아낸 "Night And Day"로 이어지는 흐름이나, 잔잔한 분위기의 두 곡 사이에서 나른함을 달래주는 "Blue Skies"가 그러하다. 이후로도 하이 템포 편곡을 통해 극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No Moon At All", 꿈속에서의 재회를 기약하듯 발랄한 진행을 보이는 "I'll See You In My Dreams" 등이 후반부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50분에 이르는 시간을 비움의 미덕으로 가득 채운 본 음반에는 이제껏 무언가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던 청자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선사한다. 오늘 할 일은 잠시 내일로 미루고 다이애나 크롤의 목소리를 타고 부유해보는 건 어떨까. 밀린 숙제로 괴로워하는 것은 내일의 나지, 오늘의 나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