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다. 예전과 달리 1인 가정이 늘어나고 혈연을 넘어서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출현하는 시대가 되었다.
일부러 사진관을 찾아가서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 큰 행사였던 시대가 불과 한 세대 전의 일인데, 이제는 누구나 카메라의 기능을 능가하는 스마트폰으로 자연스럽게 사진을 남긴다. 아버지는 사진찍기를 즐기셨기에 내 앨범은 갓난아이 때부터 청소년기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께서 찍어준 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아들 딸이 결혼을 한 후로는 손자손녀들의 사진을 찍었고, 이삼 년에 한 번씩은 손자녀를 불러 모아 맛있는 식사를 사주시며 가족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사남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족사진을 찍으러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만의 사진과 아버지의 독사진까지 더하는 마음이 착잡했지만 사진찍기에 익숙한 가족이었기에 아버지의 영정 사진 준비도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그날의 점심 식사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간단하게 끝났고 아버지는 바로 입원을 하셨고 그날 이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실 수 없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난 후, 서랍에서 아버지께서 손수 준비해두신 영정을 발견하고 우리들의 생각이 결코 아버지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께서 마지막 3년을 지내신 시골집에는 여전히 여러 장의 대형 가족사진이 걸려있는데 식구가 하나씩 늘어난 사진을 차례로 들여다보면서 그토록 가족과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키려 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족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리움을 준비하고 생명의 통로를 확인해 나가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사진이야말로 인류의 역사와 추억을 담아내는 도구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으며, 어느새 회화의 한 부분인 판화의 개념으로 예술의 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요즈음은 사진찍기와 편집이 매우 수월하고 편리해졌지만 그만큼 사진을 찍고 지우는 일도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문득 생명을 다루는 현대인의 삶도 사진찍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명을 사랑의 수고 없이 필요에 따라 찍어 내고-copy-, 결혼생활 속에서도 아날로그로 키워내야 하는 아이들의 존재를 디지털 방식으로 지우는-delete- 것이다.
아이들 키우기가 험한 세상이라, 자녀양육 대신 다른 일로 삶의 유산을 남기기 위하여, 부부만의 생활이나 비혼을 택하는 비율이 늘어나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이 없는 가족사진, 셀프카메라 사진으로 가득한 SNS 게시물을 통해 내다보는 미래의 창은 어쩐지 허허롭다.
사진을 찍어 벽에 붙이고 있는 아들에게서 그 아이의 세포에 찍혀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내 안에 찍혀있는 여러가지 표정의 가족사진과, 여전히 빈집을 지키고 있을 그 시절의 얼굴들, 영정에서조차 자유로워진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