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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Apr 30. 2021

문 두리는 소리

- 여보세요, 나는 누구입니까

문 두드리는 소리


진화 이경희


모처럼 가족들이 모여서 저녁식사를 하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주말의 밤이었다. 

누군가 벨을 누르는 대신 쿵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모니터를 켰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니 뭔가 인기척이 들려서 아들이 조심스럽게 나가서 계단 전등을 켰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었다. 진땀을 흘리며 벌벌 떨고 있는 노인이었다. 

깡마른 체격에 백발의 커트를 한 할머니가 어딘지 낯 익은 얼굴이라 가만히 뜯어보니 근래에 병환으로 출입을 하지 못 한다던 이웃집 할머니다. 

할머니는 무엇엔가 쫓기는 듯 떨면서 옥상 문을 열어 달라고 사정을 했다. 누군가 당신을 잡아가려고 해서 피하려고 꼭대기 층까지 기어서 올라왔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구순이 넘었는데 70대의 아들과 두 식구가 산다고 했다. 아마도 그날은 요양보호사가 퇴근한 후 어머니가 주무시는 줄 알고 아드님이 잠시 외출을 했었나 보다. 

마침 내가 동네 반장을 맡고 있어서 그 분의 연락처를 알고 있기에 전화를 했다. 볼 일이 있어서 나왔는데 집에 가려면 시간이 걸리니 이웃에 사는 동생에게 연락을 해서 집에 모시고 가게 하겠다며 가족이 올 때까지 보호를 부탁한다고 했다. 

전화 너머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에서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 가정의 어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옥상 층계참에서 모시고 내려와 우리 집 앞 계단에 자리를 마련해서 앉으시라고 했다. 

생수를 한 잔 드리고 땀을 닦으라고 수건을 갖다 드렸더니 조금씩 안정을 찾으며 더듬더듬 본인의 일대기를 말씀하셨다. 

시간은 1930년대로 갔다가 1950년대로갔다가 2000년 대로 건너뛰었다. 반복되는 내용은 ‘친정이 이북인데 혼자 넘어왔다, 열심히 의류사업을 해서 자녀들은 키웠다, 그러다 오랜 세월 억류를 당했다, 용서를 하고 합의를 봤는데 지금 누군가를 시켜 나를 잡으러 왔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따님이 올 때까지 안심하고 기다리게 해야 하므로 그 분의 이야기를 자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과거의 일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았지만 협박과 납치의 위험에 처했다는 것은 인지장애에서 오는 망상이라는 것을 경험 상 알고 있다. 

시어머니도 돌아가실 무렵에 섬망 증상이 심해서 정보기관에 붙들어가려 한다고 두려워했고 식구들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목욕탕 욕조까지 기어가서 숨기도 하셨다.
 
시어머니는 식구들이 놀라서 어떻게 목욕탕까지 가셨느냐고 물으면 당신도 모르니 이유를 묻지 말라고 하셨고, 
친정어머니는 요즘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도통 생각이 안 난다고 미안해 하신다. 

이웃집 할머니의 끝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25년 간 모시고 살다가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구순에 이른 친정어머니 생각이 나서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다음에 또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어쩌나 싶어서 할머니께 이름과 집 주소를 물어보니 그런 건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지금도 저 아래서 나쁜 사람들이 수색을 하고 있으니 계단 불도 모두 끄라고 재촉을 했다. 

어째서 기억 속에서 행복하고 평안했던 기억을 사라지고 고통 당한 느낌만 남아 실체 없는 두려움과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일까.
 
30분쯤 지나서 할머니의 딸과 사위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딸 부부는 몇 번씩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노인을 모시고 내려갔다. 

문득 1인 가정이 많아지고 이웃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세태에 고령인구가 점점 늘어나면 노인성질환으로 건강을 잃는 독거노인들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나는 어디서 누구와 살아야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여명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잊을 만 했는데 엊저녁에 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모니터를 누르고 누구냐고 물으니 “여기가 식당 아니요?”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가족이 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나다 잠잠해졌다. 

할머니는 하고 많은 집 중에서 왜 맨 꼭대기에 있는 우리 집에 늘 찾아오는지 아무래도 안전하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인지기능장애가 와도 감정은 끝까지 남는다고 한다. 아기에서 노인까지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인지기능이 떨어진 어르신들에게 무엇보다 존중과 따뜻한 환대가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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