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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Jul 25. 2021

염전 옆의 포도밭

- 소금꽃이 피는 마을, 포도는 익어가고

염전 옆의 포도밭


진화 이경희


사진을 찍으러 대부도 염전에 갔다. 따가운 햇살 아래 정육면체 갑(匣) 모양의 소금이 영글고 있었다. 늙은 염부가 졸아드는 바닷물 속에서 연신 소금을 모아 외발 수레로 날랐다. 그의 이마에 구슬땀이 쏟아지는 만큼 바다색과 풀잎색의 비닐로 허술하게 지어진 소금창고에 하얀 소금이 수북이 쌓여갔다. 바다와 햇살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천일염이 끊임없이 거두어지는 현장은 가을걷이를 하는 논밭 이상으로 풍요로운 옥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길고 맑은 날은 매일 소금을 거두고, 해가 짧은 가을날에는 이틀에 한 번씩 소금을 모아 들인다고 한다.


소금물을 끌어들이다 보면 더러 작은 게, 물고기, 해초가 따라올라 오기도 한다. ‘바닷물인데 뭐는 없겠수.’ 염부의 아낙이 무심하게 대꾸하며 그것들을 골라냈다. 저들이 함께 살던 바닷물이니 온갖 무기질과 키토산인들 없겠는가. 더러 식탁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박대를 받지만 소금이 태어나는 과정을 보니 천일염이야말로 소중한 자연의 선물임을 깨닫는다.


소금이 거두어진 염전에는 다시 바닷물이 채워진다. 잔잔한 수면 위에 푸른 하늘과 구름과 새가 물 그림을 그리고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이 그림을 말린다. 밤이면 달과 별이 조용히 내려와 염전에서 미역을 감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소금의 원재료는 바닷물만이 아니다. 온갖 자연의 춤과 노래가 작은 갑(匣) 안에 비밀스럽게 숨겨져서 결정을 이룬 뒤 사람의 몸 안에 녹아들어 심장을 뛰게 하고, 눈물과 땀과 피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웬일일까. 염부 내외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곳 바로 옆의 염전은 말끔히 비어있었다. 외발 수레와 플라스틱 삽은 깨끗이 닦여 있었고, 갓 빨아놓은 듯한 운동화 한 켤레가 막걸리 병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해도 많이 남았는데 일찌감치 소금농사를 마친 것일까. 창고에도 견고하게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갔다우. 소금도 금인데 금을 저렇게 그득 쌓아놓고도 빚에 몰려 제 목숨을 끊다니… 어서 일 마치고 문상을 가야지.’ 팔소매로 땀을 닦으며 그녀가 혀를 찼다. 금을 생산해도 부유해질 수 없다니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소박한 소금 한 알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와 시간이 축적되어 있듯이 삶에도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 떫은맛이 빠짐없이 버무려져 있을 터인데, 조금만 더 참고 견디지. 날마다 그 귀한 소산을 얻으면서도 고통과 절망이 기쁨과 즐거움을 삼켜버리다니, 얼굴조차 본일 없는 예순 살의 염부가 마냥 안쓰러웠다. 물이 빠져서 텅 빈 그의 염전에는 검은 타일이 바닥을 드러내고 구름도, 나무도, 새도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했다.


빈 염전은 점점 더 말라가고, 바닷물이 찰랑대는 노부부의 염전에는 붉은 노을 속에서도 끊임없이 하얀 꽃이 피어났다. 소금을 거두면서 포도 농사를 짓는 그들은 두 가지 일을 해서 자녀들을 키우고 그럭저럭 살아왔다고 한다. 외발 수레에 묻은 소금을 두어 톨 입에 넣어보았다. 소금에는 짭짤한 맛만 나는 게 아니었다. 천일염에 포함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네랄 성분 때문인지 단맛까지 어우러진 깊고 오묘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섬을 돌아 나오는데 하얀 봉지를 쓴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려서 익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포도밭이다. 그 섬에서는 9월 중순이 되어야 노지 포도가 나온다고 한다. 맑은 햇살과 해풍이 키우는 포도, 특히 염전 옆 포도밭에서 가꾸는 포도는 유독 달고 향기롭다는 소문을 들었다. 단맛이 나는 과채류에 소금을 약간 더하면 그 맛이 더 깊어지는 것도 같은 원리일 것이다.


바다와 바람과 햇살이 키우는 소금, 흙과 햇살과 바람이 키우는 포도가 사이좋게 영그는 섬에서 계절도 그럭저럭 익어가는 중이다. 9월이 오면 염전 옆의 포도밭에 다시 달려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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