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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냥육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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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May 17. 2022

나의 사랑스러운 찐따 고양이

INTP 삼색고양이 입양기

2017년은 집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지 1년이 되던 해다. 그 1년은 과연 나라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속가능’한 멸사봉공의 애티튜드로 집사 노릇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검증하는 시간이었다. 캣 카페와 각종 집사 친구들의 집을 오가며 알러지 반응이 없다는 걸 확인했고, 생애 주기와 수입 수준을 따져 내가 한 생명을 최소한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인지에 대한 혹독한 자아성찰을 거쳤다.      


그러나 내 다짐은 다짐이었을 뿐, 본격적으로 입양 시장에 진입한 초보 집사에게 네이버 ‘고다’ 카페는 높은 벽이었다. 입양을 원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나는 한 번도 고양이를 키워보지 못한 그것도 집을 비우기 일쑤인 바쁜 사회 초년생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퇴짜를 받은 어느 날, 하루 접속자 수가 두 자릿수가 채 되지 않던 허름한(?) 웹사이트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입양 공고를 읽게 되었다.      


서대문구의 한 주택가 고랑에 빠져 있던 성묘 1마리와 새끼 고양이 3마리를 구조했다는 글이었다. 글과 함께 게시된 사진엔 새끼 고양이 삼 남매가 사랑스럽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처연한 표정의 삼색 고양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주말 오전, 땀을 뻘뻘 흘리며 로얄캐닌 키튼 4kg 한 포대를 품에 안고 캣맘들을 찾아가 면접을 봤고, 명함이 오갔고, 그렇게 몽실이와 가족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양이 구조가 처음이라던 초보 캣맘들과 난 아마도 서로가 서로를 낚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입양 초기 큰 적개심과 두려움을 모두 가지고 있던 몽실 ⓒ letitbeautumn




몽실이는 스트릿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큰, 주관이 있는 고양이었다. 적응을 위한 한 두 달 가량 불면증에 시달렸다. 몽실이는 서러운 음성으로 밤이면 엄마를 그리워하며 늘 울었고, 내 기척이 느껴지기만 해도 하악질을 했다. 지독한 짝사랑을 겪는 동안 나는 각종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고 멘탈 안정을 위해 가끔은 주말에 호텔에 가서 자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구조 냥이를 모시는 집사들이라면 언젠가 거치게 되는 해원의 그날. 그날은 왔다. 누워있던 내 가슴팍 위에 벼락처럼 다가와 식빵을 구우며 골골송을 부르기 시작한 감동과 눈물의 그날! 그날 이후로 몽실이는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미저리 찐따 고양이가 되었다.  

    

새침한 표정과 공주 같은 애티튜드 탓에 ‘체리’, ‘메리’ 같은 이름을 지인들은 추천했지만 집사의 미적 감각 때문에 몽실이는 몽실이가 되었다. 그리고 몽실 본인도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아님) 점차 이름에 걸맞은(?) 푸짐한 피지컬로 성장하게 된다. 통통하게 출렁이는 뱃살과 부쩍 느려진 발걸음은 늘 비수가 되어 확대범 집사의 양심에 싸늘하게 꽂힌다.   


적응을 거치며 잔소리꾼이 되어버린 몽실 ⓒ letitbeautumn


몽실이는 스트릿 출신 고양이로서의 덕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일단 먹을 것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사료든 두려움 없이 도전한다. 매사 간식에 감사해 한다. 심지어 물도 잘 마신다. 매번 침대에서 잠들지만 고양이의 본분을 지켜 동그라미를 만드는 등 일부 몰지각한 고양이들과 달리 어설픈 사람의 흉내를 내지 않는다. 가끔 몽실이를 관찰하다보면 사람의 길과, 고양이의 길은 다르다는 것을 엄중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몽실이는 먹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에 ‘성의’를 요구하는 주관이 있는 고양이다. 성의 없이 흔드는 낚싯대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사냥감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 이후 최대한 자연 그대로 구현해 비정형적인 동선과 속도를 갖춰야만 그제야 동공을 확장하고 궁디를 들썩인다. 간혹 집사가 귀가가 늦거나 관심이 소홀해졌다 싶을 땐 힐난의 감정을 담은 약 10분 여 간의 잔소리 폭탄을 맞는다. 집사는 알 것이다. 음소로 따지자면 ‘냥’이 아닌 ‘냐아아아아아아앙’에 이르는 소리다.      


이런 귀족적 애티튜드를 가진 몽실이가 특유의 찐따미를 풍기는 순간은 집에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다. 누구보다 품위 있던 고양이는 금세 음침한 히키코모리의 모습으로 분한다. 그럼에도 확실한 존재감을 각인시키기를 원한다. 몽실의 MBTI를 INTP로 판단하는 이유다(※INTP 좋아합니다 저랑 궁합 최상). 구석에서 음험하게 외부인들을 두루 관찰하고, 외부인과 집사와의 친분 관계를 판단해 나름 서열을 정하는 듯하다. 지인 몇몇은 누가 보아도 몽실에게 하급로 분류되어 사냥감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십 수 개의 고양이 가구와 장난감이 우리를 스쳐지나갔지만 몽실에게 여전히 가장 큰 유희거리는 집사, 나인 것 같다. 가끔 지쳐 잠든 뒤 눈을 떴을 때, 어딘가 몰두해 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반경 1m 이내에 늘 호기심 어린 두 눈으로 날 바라보는 몽실이가 있다. 야밤에 정체 모를 누군가가 난데없이 문을 두드릴 때나, 고함을 칠 때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안전한 구석으로 혼자 대피하는 얌체 같은 고양이지만. 나는 안다. 우리는 서로를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걸.     




살다가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아무리 안락한 집이라도 빛이 들지 않는 음습한 구석이나 평소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공간에서 풍기는 싸늘한 기운. 어렸을 때 많이 봤던 전설의 고향 때문일 수도 있고, 이유 없는 불안증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서늘함을 가끔 느낄 때마다 내 공간은 갑자기 낯설어지곤 했다. 팔엔 영문 모를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몽실이와 함께한 지난 6년간 한 번도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다. 신기한 일이다. 이상한 용기가 생기고 안심이 된다. 누구보다 우리 집 구석구석을 잘 파악하고 있고, 집에 들어온 새로운 것이라면 가장 먼저 검열(?) 검사하는 몽실이 덕에 비로소 내 공간은 따뜻한 나의 세상이 된다. 몽실은 우리의 공간을 우리의 공간으로 만드는 최초이자 최후의 필터다.      


향긋한 봄꽃 향기를 맡으며 산책할 때, 바다를 볼 때, 티 없이 청명한 하늘을 볼 때, 귀여운 유모차를 타고 산책 나온 강아지들을 볼 때 늘 집에만 있을 나의 몽실이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 낮잠 시간엔 집사가 귀가해도 마중도 안 나오는 기성 고양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생리통으로 끙끙 앓는 집사에게 뜨뜻한 배를 얹어주고(무게도 추가), 가끔 취한 집사의 거친 앵김과 불안한 포옹에도 한심스런 눈빛으로 참아주는 나의 찐따 고양이. 몽실이는 늘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더 나은 집사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몽실이와 함께한 뒤 나는 뮤지컬 캣츠를 보면 눈물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집사가 아닌 사람들은 모르겠지 ‘젤리클 캣츠’가 얼마나 슬픈 노래인지. 비교도 되지 않게 푸짐해졌지만 몽실이는 여전히 나의 어린 새끼 고양이다. 밤마다 엄마를 찾아 서럽게 울던, 겁을 먹고 적응하길 거부하던 한 줌도 안 되었던 나의 아기 고양이.

작은 나의 몽실이는 길에 있는 모든 약하고 어린 생명체들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을 선물해주었다. 그렇게 강인하고 도톰한 사랑으로 작은 내 집을 따뜻하게 감싼다. 




※ 위 글은 길고양이 뉴스레터 <캣차>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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