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이웃이 되는 법
아파트는 복잡한 주거 공간이다. 네모 반듯 우유곽 같은 건물 안에서 각자의 삶이 정 없이 구분된 공간이면서도 결국 서로 돕고 돕는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함께 살기 위해선 그런 태도가 꼭 필요하다는 걸 누구나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내 나이엔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적잖은 연식을 먹은 우리 아파트는 환기 시설이 아무래도 낡았다. 다행히 방음은 그나마 잘 되는 편이지만 이상하게 환풍구가 집마다 연결돼 있는 모양인지, 끼니마다 이웃들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를 알 수 있다. 아파트 커뮤니티 같은 곳에선 그 냄새를 견디기 어렵다는 글도 더러 올라오지만 나는 오히려 좋다는 생각도 한다.
당직 없는 주말 아침 잠을 깨우는 건 식용유 두른 팬에 달걀 후라이 굽는 옆집 냄새다. 어떤 날은 라면을 끓이기도 하고, 또 마늘이 많이 들어간 찌개 요리를 하기도 한다. 그런 음식들은 꼭 집밥 냄새를 솔솔 풍긴다. 손바닥 만한 크기야 똑같아도 몇 년째 머물렀던 원룸에선 도무지 겪어보지 못한 냄새다.
비위가 그닥 약한 편이 아닌 나는 밥 냄새가 풍겨올 때마다 나와 벽을 사이에 둔 어떤 집에선 재료들을 사다, 요리를 해다, 아끼는 사람들 아니면 스스로를 먹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그 밥을 먹고 자랄 누군가들을 떠올린다. 그런 생각을 하면 냄새가 그렇게 불쾌하지만은 않다.
우리 아파트에선 비와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빛과 살 에는 추위를 한 층에 있는 여섯 가구가 함께 견디며 살고 있다. 저마다 기쁜 일 슬픈 일 각종 멘탈과 어이털리는 일 등 희노애락애오욕을 겪는 이들이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린다.
건너편 옆집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와 이름이 정상*로 시작하는 할아버지 부부가 함께 산다. 탄수화물을 줄이기로 하면서 도무지 밥 해먹을 일이 없어지니 집에 처치 곤란한 20kg짜리 쌀 포대가 늘 청소할 때 걸리적거렸다. 이걸 어찌할까 고민하다 엄마 조언으로 이분들께 드렸다. "젊은 처자 결혼은 언제 한대유?"라는 코멘트를 받아 왔다.
물건을 주문할 때보다 언박싱에 덜 진심인 내 성격 탓에 우리 층에서 나는 조금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밤 퇴근이 일쑤라 바로바로 택배 상자를 거둬들이지 않다보니 맨 끝 집 할머니는 다른 쪽 끝 집에 사는 처자가 집 안에서 혹시 쓰러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나보다. 애꿎은 배달부가 현관문 밖에서 이 집 처자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는 생뚱맞은 취조를 당했다.
노인들이 많이 살다보니 조용한 편인 우리 아파트에도 '명물'이 있다. 여름 들어 매번 퇴근 후 운동을 하러 가는 길에 하네스를 하고 산책하는 고양이와 마주쳤다. '제리'라는 조금 숙성된 치즈색 고양이다. "키 크고 예쁜 여자들을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망설임 없이 나에게 몸을 부비대는 고양이를 보며 하네스 줄을 붙잡고 있는 여자 집사님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산책하는 고양이가 워낙 희귀하다보니 그 모습이 좀 많이 웃기다. 24시간 상주 경비원이라도 되는 양 아파트 정문에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검문한다. 극내향에 인간이라면 나를 제외하고 전부 극혐하는 쫄보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선지, 이런 인싸 고양이는 낯설다.
어슬렁거리며 동네 길냥이들에게 말을 걸다 얻어맞은 적도 많단다. 완전히 집사에게 포박당해 집으로 끌려 들어오는 모습도 종종 봤는데 그때마다 마주치는 집사 이웃은 "고양이는 산책 안하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요"라고 힘없이 말했다. 그 모습이 세트로 귀엽고 짠하고 웃기고 그랬다.
고양이가 인연이 되어주면서 드디어 집사님 집에도 놀러가봤다. 혼자 사는 싱글 여성,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는 미술 선생님. 어쩐지 계단실에 캔버스가 몇 장이나 놓여 있더라니. 같은 아파트에 또 비슷한 연배의 분이 게신데 종종 주말마다 점심을 같이 만들어 먹고 등산도 같이 다닌다고 한다. 제리 덕에 이웃분들 번호도 많이 땄다는데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굳이 허물 필요가 있나 싶었던 벽을 고양이가 뛰어넘었다. 배를 까고 기지개하는 천하태평한 제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