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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비 Nov 18. 2021

왜 내 아이를 보면 자꾸 어린 내가 떠오를까

그 시절 상처 받았던 나에게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말은 나에겐 맞지 않는  같다. 나의 어린 시절에 불행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엔  세상에 통용되고 있는 불행들이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하다. 목숨이 걸린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런 커다란 일들에 비하면 나의 불행은 보잘것없다. 불행이라는 것을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곤 해도 사실 불행은 비교와   어울리는 단어이기는 하다. 타인의 곤궁함에서, 폭력에의 노출에서 나의 무사를 안도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자기 위로법이니까. 반대로 너의 불행은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식의 불행 배틀로 술자리를 어지럽히는 일은  어떻고.


그보다는 어린 시절 나는 불행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내 어린 시절을 수식하는 대신, 그냥 나의 감정에 기대고자 한다. 어린 시절, 나는 불행했다. 어쩌면 행복한 날도, 웃는 날도 있었겠지만 그런 날 조차 나의 마음 한쪽은 어둠이었다. 예측 불가능한 싸움들, 높아지는 언성과 폭력의 예고, 무너지는 가정경제의 두려움, 내 미래를 인질로 하는 협박, 그리고 실제 폭력의 순간들이 띄엄띄엄 솔기질된 것이 나의 어린 시절에 연상되는 이미지들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불행하지 않았던 순간'들은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몸집을 불려 가는 불행의 기억들에 압도되어 내 머릿속에서 점차 자리를 뺏겨 버렸다.


엄마는 자신의 절망스러운 현실을 공부 잘하는 자식들로써 구원받기를 원했고(그 또한 우리에겐 또 다른 시달림이었으나), 덕분에 나는 대학생이 되어 집을 나올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순간이었다. 이후로 나는 가족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부모는 내 인생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 여기며 존재의 크기를 접을 수 있을 때까지 접었다. 그렇게 조금씩 원가정과 멀어지면서 비로소 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불행이라는 그림자에서 약간이나마 자유로워졌다. '불안하지 않아도 되는 일상' 이 나에게 드디어 허락이 된 것이다.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원조까지 완전히 독립한 스물 다섯 무렵부턴, 나 자신으로써 행복할 권리를 누리며 살았다. 집이라는 공간이 공포스럽지 않고, 타인의 기척에, 걸려오는 전화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일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다들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살았던 거야? 싶어서(물론 각자의 말 못 할 사정은 있겠지만)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일 년에 두 번, 명절만 잘 버티면 그럭저럭 살만했다.


19년을 부모와 살다 나와, 딱 그만큼 더 살아 39살이 되었다. 긴 시간이다. 그 사이 부모는 파산신청을 해서 빚을 청산하고, 대출을 있는 대로 끌어다 써서 깡통집이 되어버린 아파트를 법원에 넘기고 월세집으로 옮겼다. 노환의 외할머니를 모신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엄마는 구질구질한 월세집을 나와 외할머니와 살기 시작했고, 나는 결혼을 했고, 아버지는 암에 걸려 수술을 했다. 어린 시절을 하염없이 붙들고 살기엔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대충 잊고 살았다. 어쩌다 지인들과 이야기할 땐, 우리 집 진짜 거지 같잖아, 하면서 남 얘기하듯 웃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런데 나에게 아이가 생기고 나면서 좀 달라졌다. 한 번씩 어린 시절의 내가 기억의 수면 위로 불쑥불쑥 떠오른다. 아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내 가장 큰 기쁨이자 행복인데도 아이를 보다가 이유 없이 슬픈 기분이 들거나, 속을 뒤집는 분노가 차오르는 때가 있다. 책이나 영상으로 육아 관련 공부를 할 때도, 자꾸 나와 내 아이가 아닌 어린 나와 내 부모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나에게 왜 그랬을까. 나는 내가 전혀 치유되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저 시간이란 모래 몇 줌으로 어설프게 가려져 있던 그 시절의 나를, 나를 닮은 내 아이를 통해 다시금 직시하게 된 것이다.


나는 아이를 통해 나를 보는 한편, 나를 통해 부모를 볼 수도 있었다. 많은 좋은 선례가 그랬듯, 나 또한 이러한 경험을 통해 부모를 더 잘 이해하고 감사에 도달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나의 마음을 훨씬 가볍게 하리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러나 내 나이의 부모에게 대입해볼수록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각은, 어쩐지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우리 부모가 나에게, 우리에게 그렇게도 화를 내고 짜증을 냈던 것은, 그저 그들이 화가 났고 짜증이 났기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행동하며 오로지 욕구로만 충만한 어린아이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 받아들일 수 없는 어른들에겐 얼마나 심각한 분노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아이를 키워보니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는 자신들의 그 분노의 감정이 정당하다고 느꼈고, 가감 없이 자식들에게 전달했던 것일 뿐이라고. 거기엔 어떤 다른 큰 뜻이나 의도는 없었다고. 그저 애들이니까, 애들한텐 그래도 되니까 그랬던 거라고.


내 부모는, 특히 엄마는, 나의 이런 생각에 많이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의 상처를 이야기했을 때 엄마는, 나는 최선을 다했다,며 눈물로 호소하셨다. 나 또한 부정할 수는 없다. 엄마는 엄마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폭력적인 남편을 견디고, 가정 경제를 혼자 책임졌다. 빚더미 속에서도 친척에게 돈을 빌려 어학연수를 보내주었다. 그 험난한 고난과 역경 중에 나를 공부로 몰아세우고 부부갈등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한 것은 너무나 사소한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대학 공부 시켜 주고, 없는 형편에 어떻게든 배우고 싶다는 것 다 배우게 해 준 수고와 희생을 알기에 늘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차오를 때면 내 안의 죄책감과도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고 싶다.

한 번쯤은 이렇게 써야지만 내가 치유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아이에게 내 상처를 물려주게 될 것이다.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 나를 닮았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화를 내고 말 것이다. 나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으니까. 나처럼 다른 사람의 눈치만 보고 매사에 불안함과 싸우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내 아이가 마음만은 나보다 편하게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에겐 이 고백의 시간이 절실하다. 어쩌면 스스로를 변호하고 포장하는 자기 연민 대잔치가 되겠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나를 위해서, 내 아이를 위해서, 한 번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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