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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민관 Jun 01. 2019

기생충, 2019

영화 속 계급구조만큼이나 견고한 봉준호라는 장르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영화는 한 줌 빛이 겨우 들어오는 ‘기택’네 가족의 반지하 보금자리에서 시작한다. 기택네 가족은 가난하다. 그들은 마치 곱등이가 그들의 집에 빌붙듯이 윗집의 와이파이에, 지나가던 소독차의 가스에, 또 동네 피자가게에 빌붙어 겨우 살아가고 있다. 이 가족의 아들 ‘기우’가, 친구가 맡던 학생 한 명의 과외를 대신해달라는 제안을 받으며 영화는 발걸음을 떼고, 하나의 패턴을 흥미롭게 변용하며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초중반까지의 영화 내용은 ‘유쾌한 가족사기단이 꿈꾸는 계급상승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 기우의 친구가 과외를 대신 부탁하며 선물한 수석은 재물운을 불러온다는 역할을 너무나 잘 수행한다. 심지어 ‘연교’가 제시카라는 가명을 쓴 ‘기정’ 앞에서 설설 기는 장면에선 일견 권력관계가 뒤집힌 듯 보인다. 하지만 그 계급상승의 과정은 너무나 어설프고 유약한 착각에 불과하다. 관객들은 ‘동익’네 가족이 잠시 캠핑을 간 틈을 타 술판을 벌이는 기택네 가족의 무방비함을 불안하게 바라보지만,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걱정의 방향대로 끌어가지 않는다.

가정부 아줌마 ‘문광’의 재등장과 함께 쏟아지는 폭우에 의해 영화가 다루는 내용은 '계급'에서 ‘생존’으로 전이된다. 기택의 아내 ‘충숙’은 지하실에 숨어 살아가던 ‘근세’를 마치 바퀴벌레 보듯 역겨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문광과 근세에게 선을 그으려 하지만, 기우의 작은 실수와 십 초 남짓한 동영상 하나에 상황은 역전되고 만다. 난장판 끝에 자신들보다 더 아래에 있던 최하층 기생충과의 경쟁에서 일단 승리한 기택네는, 돌아온 동익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치 바퀴벌레가 그렇듯 황급히 어두운 구석으로 들어가 숨는다. 이 과정에서 연교는 아주 자연스럽게 충숙에게 ‘짜파구리’를 해달라고 한다. 양주의 향을 즐길 줄 몰라 전부 조금씩 섞어 마시고 심지어 강아지용 간식을 안주로 착각하는 기택네와 달리, 상류층인 동익네는 하류층의 문화도 아주 자유롭게 즐긴다.


한편, 숨어있던 가족은 동익과 연교의 가장 은밀한 대화에서 냄새로 명확히 선 그어지고 또 멸시당하는 스스로를 깨닫는다. 대화나 행동에서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던 기택이 유일하게 선을 넘는 부분이 바로 이 냄새다. 그들의 냄새는 화학적인 냄새가 아닌, 계급 간의 타자화가 만들어낸 계층의 냄새다. 사회 상층에 위치한 동익네 가족은 그 ‘선을 넘는’ 냄새를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시청각 예술인 영화로는 냄새가 전달되지 않기에, 관객들은 자연스레 냄새를 느끼지 못하는 기택네 가족의 입장이 된다. 동익은 냄새에 대한 언급으로 기택네 뿐 아니라 관객들을 함께 사회 하층에 격리한다. 새벽에 간신히 저택을 탈출한 가족은 집으로 가면서 수많은 내리막길과 터널을 지나는데, 이는 내내 언급한 바퀴벌레의 소굴을 연상케 한다.

쏟아지는 폭우는 동익네에겐 그저 캠핑을 망친 성가신 존재, 심지어 미세먼지를 씻어내 준 고마운 존재이지만, 기택네에게는 삶 전부를 앗아간 재앙이 된다. 누군가에게 귀찮음에 불과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심지어 기택네가 살던 동네 전체를 위협한 이 파괴적인 폭우는, 마당 한가운데 설치한 막내 ‘다송’의 텐트조차 침범하지 못한다. 물바다가 된 집과 떠내려가는 물건들 사이에서 기택네는 각자 소중한 것을 챙긴다. 기택은 아내의 메달을, 기정은 담배와 별 의미 없어진 비상금을, 그리고 기우는 수석을. 그런데 수석이 물 위로 떠오른다. 분명 이상한 장면이다. 돌덩어리가 물에 둥둥 뜨다니. 그때부터 대담한 사기 계획의 초기 설계자 기우는 명석함을 잃고 이상한 상태가 된다. 그는 수재민 대피소에서 수석을 꼭 안고 놔주지 않는다. 수석이 자기에게 붙었다면서. 기우에게 붙은 수석은 부적으로의 역할을 다했다. 쓸모를 다한 부적은 이제 주인의 기대를 배반하여, 재물이 아닌 가난이 된다. 기우는 이것을 뿌리칠 수가 없다. 가난은 물속에서도 중력을 거스르고 떠오르며, 모든 걸 잃은 피난민에게도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다.


그런 기우에게 기택은, 모든 계획이 실패하므로 무계획만이 실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기택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가난한 이들의 계획이 들어맞은 적이 있던가? <괴물>에서 고아성은 옷을 묶어 하수구를 탈출하려 하나 때마침 들어온 괴물에게 삼켜지고, 변희봉은 총으로 괴물을 사냥하려다가 총알 수를 잘못 계산해 죽으며, 박해일은 기름통과 불 붙인 소주병으로 괴물을 잡으려다 마지막 남은 병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고 만다. <설국열차>에서는 꼬리칸의 예상과 달리 열차 앞에는 총알이 남아 있었고, 윌포드와 길리엄은 내통하고 있었으며, 남궁민수가 크로놀 폭탄으로 문을 부수겠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폭탄은 열차 전체를 파괴해 버린다. 어쩌면 기우의 계획은 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포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다송의 생일파티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기우는 자신들의 철저한 연습을 기반으로 한 계획이 고작 비 한 번에 처참히 실패한 것과는 달리, 즉흥적 통화 몇 번으로 이루어진 부자들의 계획은 너무나도 잘 실현된다는 걸 확인한다. 그는 수석을 들고 지하실로 향한다. 하지만 역시 그의 계획은 실패한다. 수석은 그를 배반해 손에서 미끄러진다. 근세는 그들 부부를 수석으로 죽이려 한 기우를 역으로 수석으로 내리쳐 쓰러뜨리고는, 식칼을 들고 파티가 벌어지는 마당으로 향한다. 그가 찌른 것은 여동생 ‘기정’이다. 칼에 찔린 기정과 피범벅이 된 기우를 보고 어쩔 줄 몰라하던 기택은, 자신의 딸이 죽어가는 그 순간에마저 냄새 때문에 코를 틀어막는 동익을 본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동익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는다. 동익이 죽을 짓을 했나? 그렇지 않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를 만큼의 혐오가, ‘냄새’로 표현된 계급 간 타자화와 무심한 차별 속에서 꾸준히 자라났다. 동익에게는 전혀 전해지지 않았을 그 혐오와 모멸감이 관객들에게는 너무나 잘 전달되었기에, 영화는 아주 잔인하고 불편해진다. 맡을 수 없는 냄새에 의해 기택네와 같은 위치에 격리된 관객들은, 동익네가 알아차리지 못한 차별을 알아차리며 살인을 납득한다. 그리고 그 납득은 관객들을 괴롭힌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너무도 아리송하고 이유 없는 살인 사건이, 관객들에게는 적나라하고 설명 가능한 일이 된다. 보통 영화에서는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 때 찝찝함이 남지만, <기생충>에서는 반대로 너무 잘 밝혀진 진상이 잔인한 찝찝함을 남긴다.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던 기우는 뇌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눈을 뜨지만, 칼에 찔린 기정은 살아남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기우와 기택, 충숙은 각자 정해진 계급구조 내에서 기우의 친구와 윤 기사, 문광이 가지고 있던 역할을 대체했다. 기정은 그렇지 않다. 기정은 카리스마와 언변을 통해 스스로의 역할을 만들었다. 그러나 계급사회는 계급 안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 단 하나의 기회조차 내버려 두지 않는다.

뇌수술을 마친 후 연신 웃기만 하던 기우는 기택의 모스부호를 발견하고는 혼자 무언가 중얼거린다. 그는 ‘근본적’ 문제를 깨달았다면서, 다른 것도 좋지만 이제 일단 ‘돈’을 벌겠다고 한다. 그는 역할을 다하고 자신을 배반한 수석을 떨쳐 버린다. 영화의 내용이 ‘생존투쟁’에서 다시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계급투쟁’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사실, 모든 생명체에게 ‘생존’은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생존투쟁에서 계급투쟁으로 프레임이 옮겨갔음에도, 기우는 이제야 근본적 문제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미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계급이란 단순히 생활수준의 격차가 아닌 삶 그 자체를 좌우하는 문제인 것이다.

영화는 그 후에 기우의 상상을 비춘다. 상상의 비현실성은 그전까지 기택네 가족이 꾸던 계급상승의 꿈과 겹쳐, 그 꿈이 얼마나 허황했으며 계급이란 또 얼마나 견고한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계층의 수직구조는 뼈저리게 절대적이고 너무나도 불가해하다. 계층을 자력으로 벗어나는 일은 쏟아지는 폭우를 양동이로 퍼내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깝다.


원래의 계급을 벗어나고자 했던 가족은 쏟아지는 폭우에 휩쓸려 원래의 자리, 어쩌면 더 밑으로 ‘씻겨’ 내려갔다. 최초로 계급상승의 계획을 세운 기우는 불가능한 꿈에 매몰되었고, 새로운 역할을 만들어낸 기정은 그 자리를 허락받지 못했으며, 충숙은 남편과 딸을 잃은 슬픔 속에 매장당했다.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에서 닫힌 문을 열고자 했던 송강호, ‘기택’은 스스로 지하실의 문을 닫고 ‘더 밑’으로 몸을 감췄다. 그리고 밑에 여전히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 생일파티의 비극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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