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민주노조를 깨우는 소리 호각’ 활동가 고태은
* 해당 글은 <더 넓은 광장을 그리는 사람들> 오마이뉴스 연재기사입니다. 분량을 조절한 버전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54288
민주노조를 깨우는 소리 호각 활동가, 싸우는 노동자를 기록하는 사람들 '싸람'의 기록자, 일하는시민연구소 정책위원, 대학원생.... '고태은'이라는 사람을 수식하는 단어는 많다. 실제로도 그는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기도 한데, 인터뷰를 하러 만났을 때도 그는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진행 중인 'A학교 공대위' 농성장에서 철야농성 당번을 하고 있었다.
무더위에 큰 선풍기 하나로 버티는 농성장에서 '지혜복은 학교로, 정근식은 집으로' 몸자보를 입고 있던 연구활동가 고태은을 지난 7월 29일 만나 그의 근간이 되는 노동운동과 연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 다양한 활동을 하시잖아요. 본인을 어떻게 소개하시나요?
"자리에 맞게 소개를 하는 것 같은데요, 대학원에 있을 때는 학교 소속으로, 광장에 계신 분들에겐 '민주노조를 깨우는 소리 호각'의 활동가로 소개해요. 기록 활동을 하기도 하는데요, 저 스스로는 활동가이면서 연구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에요. 요즘 말로는 '연구활동가'죠."
- 노동운동으로 활동에 진입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노동운동에 진입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관둔 학교 밖 청소년이었는데요, 학교 바깥으로 나가보니까 사회적인 차별이나 배제당하는 문제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 같아요. 그즈음에 트위터를 통해 쌍용자동차, 강정마을, 용산 참사 등의 국가 폭력 현장을 접하게 됐고, 그러면서 투쟁 사업장에 자주 가게 됐어요. 그때는 제가 활동을 시작했다기보다는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가서 뭐라도 돕는다는 마음이긴 했어요."
- 태은님이 경험했던 노동운동은 어땠나요?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 여성으로 보이는, 소위 '이 바닥'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존재가 나타나는 것에 노동운동을 주로 하던 동지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현장에서 다양한 성차별이나 폭력을 경험하다 보니 한동안 투쟁 현장에 연대하러 가는 것을 멀리했어요. 2018년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서른 번째 희생자가 나와서 대한문 분향소를 차린 시점에 농성장 지킴이를 하면서 다시 노동운동에 결합했고, 그러다가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에서 1년 정도 상임 활동을 했죠."
- '민주노조를 깨우는 소리 호각' 활동도 하시잖아요. 호각은 어떻게 해서 생겼나요?
"2023년에 건설노조 양회동 열사가 돌아가시고 나서 '양회동 열사 정신 계승 노숙 집회'가 열렸어요. 당시 윤석열이 이 집회를 저격하면서 엄정 대응을 주문했었는데요. 그즈음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을 촉구하는 '비정규직 이제그만'과 금속노조의 투쟁이 있었어요. 대법원 앞에서 1박 2일 노숙농성을 했는데, 할 때마다 그걸 뜯어가더라고요. 그때는 함께 분노하면서 싸웠거든요? 근데 주말에 전국노동자대회를 가면 민주노총은 싸우질 않는 거예요. 조직 담당자들이 경찰과 어디까지 행진할지 협의해놓고서는 조합원들이 항의하다가 끌려가서 연행되더라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을 봤어요.
그때 '운동이 이래도 되는가?'를 많이 느꼈어요. 우리가 보고 배웠던 노동운동은 상층부에 있는 민주노총이 다 정리하고 조율하는 집회가 아니라 현장에서 위험이 있더라도 싸워내서 교섭을 열어내는 비정규직 운동이었단 말이에요.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동지들과 민주노조란 무엇이고 어떤 운동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임을 만든 게 호각이에요."
- 민주노조에 대한 고민과 현장 연대를 지속하면서 느꼈던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은 어땠는지.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저의 노동운동 경험은 다 투쟁 사업장이었어요. 해고를 당했거나 해고를 무릅쓰고 싸우는 이들과 함께했었는데, 저는 노조는 다 그런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일상적인 노조 활동을 하는 현장에서는 대부분의 조합원이 노조를 보험처럼 생각하더라고요. 회사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조합비를 내는, 이른바 '자판기 노조'처럼 기능하는 거죠. 운동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게 아닌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다양한 현장을 접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노조 조직률이 높지는 않지만, 일부 정규직 중심의 노조들은 몸집이 굉장히 크거든요. 그곳이 민주적인 소통이나 투쟁, 연대 정신에 대해 공유할 수 있는 곳이라는 기대를 하고 들어오는 조합원들이 없어요. 그리고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제도적 배경도 결국 조합원 가입 경쟁에 혈안이 되도록 만들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판기 노조가 되게 만드는 것 같아요."
- 활동을 오래 해오셨는데 조직에 몸담아서 상근을 했던 1년을 제외하면 계속 개인으로 활동해오셨잖아요. 조직 소속에 대한 목마름은 없으셨는지.
“저는 원래부터 어디에 완전히 소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을 이해하지만, 그걸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게 저인 것 같아요. 제 스타일 자체가 제가 납득이 안 되는데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게 생기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하고 싶은 건 제가 선택하고 제가 책임지는 방식이 더 편하더라고요.”
- 다양한 형태의 노동에 관심을 두고, 또 다양한 현장에 연대하면서 연구도 합니다. 오늘도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지혜복 선생님 건으로 연대 농성 중이시죠. '다양한 위치의 나'를 어떻게 조율하시는지.
"사실 조율을 잘 못 해요(웃음). 다만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인가?'만 생각해요. 책임질 수 있는 선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려고 해요. 그래서 사실 처음 대학원에 올 때는 활동을 다 정리하고 갔었어요. 지금도 박사과정 중이니 연구 영역에서 해야 할 책임들을 놓지 않기 위해서 현장의 동지들한테 양해를 구하죠. 그래서 제안이 들어온 것들도 불가피하게 고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 단체 소속이 아닌 상황에서 다양한 노동 현장에 책임감을 느끼기도 쉽지 않은 일 같은데요, 당장에 내 일이 아니잖아요.
"단체에 들어 가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는 싸우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게 저한테는 더 중요해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현장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사안이나 의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으로 다가오거든요. 그 사람이 삶을 걸고 싸우는 모습에 직면하게 되는 거죠. 한국옵티칼하이테크도 지금은 많이 알려진 사업장이긴 하지만 제가 처음 구미 공장에 연대하러 갔을 때는 구미 동지들과 저밖에 없었어요. 한여름에 공장에서 싸우고 있으면 눈에 밟히잖아요."
- 연구활동도 노동운동과 관련을 지어서 하고 계시죠. 소개 부탁드려요.
"석사는 쌍용자동차 해고 가족 경험 연구를 했어요. 20대 초반에 해고노동자들의 가정이 무너지고 자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팀에서 잠시 활동했는데, 마무리를 잘 못하고 나온 게 부채감으로 남아 있었어요. 대학원에 가게 되면서 이런 고민들을 다시 풀어내게 된 거죠. 그렇게 해고노동자 연구를 하겠다고 대학원에 들어갔다가 아까 말한 상근을 하게 됐어요. 그걸 하면서 해고노동자 당사자보다는 아내의 경험 연구를 해야겠다는 걸 느꼈죠. 그 이후에도 산재 가족 경험 연구, 트랜스젠더, 장애인 노동 경험 연구 같은 걸 주로 했고 지금은 좀 더 제도적인 논의에 집중하는 중이에요."
- 소위 ‘불안정노동’을 연구하면서 가지는 고민들도 있나요.
“제도의 영역에 가면 현장과 괴리된 논의들이 많아요. 특히 현장 동지들이 제도에서 논의되는 내용에 여러 가지 이유로 동의하지 않는 면도 있고요. 저는 현장 운동과 같이 갈 수 있는 연구 활동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지금 쿠팡의 로켓 배송 사례 연구를 하는 이유도 국가의 노동 정책 안에 사용자의 책임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든요. 지금의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는 사용자들을 너무 많이 봐주는 측면이 있어요.”
- 노동운동을 하면서 노동을 연구하기도 하잖아요. 운동과 연구의 언어가 서로 보완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한테는 그 둘을 나눠서 한 경험을 다른 경험에 끌어 쓰는 개념은 아니에요. 저는 공부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운동적인 목적이 없으면 연구를 하지 않고요, 사회적 의미가 없는 학습을 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활동연구자가 아니라 연구활동가잖아요. 저는 제가 활동가 정체성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 여러 활동을 하게 하는 동력이 있나요? 운동도 공부도 꾸준히 할 수 있게 만드는.
"10년 가까이 운동을 해오다 보니까, 제가 이유와 전망을 찾을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이 세워졌어요. 저는 20대 초반부터 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내 운동'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쳤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누군지 명확히 알고,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됐죠. 그게 저를 살아남게 했던 것 같아요.
이건 제가 학교 밖 청소년이 되면서 불가피하게 거치게 된 과정인 것 같기도 해요. 언제나 어딘가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은 경계인으로 살아오면서 모든 걸 내가 다 결정하고 내가 선택해야 했거든요. 저는 학교를 관둔 지 6개월 이내에 검정고시를 볼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몰랐어요(웃음). 그렇게 1년 뒤에 검정고시를 보고 나서 대학 진학부터 늦춰지는 경험을 하면서 내가 다 책임져야 하면서도 내 조건 안에서 내가 최선의 선택을 했으면 된 거구나 하는 마음가짐이 생겼죠."
- 4개월간의 탄핵 광장에서 인상에 많이 남았던 장면을 하나 꼽는다면.
"아무래도 남태령이죠. 1차 남태령 때는 현장에 있지 못했는데, 사람들한테 계속 외면당하지만 거리에서 싸워야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우리는 박근혜 탄핵 때 이미 경험을 해봤잖아요. 남태령 이전에도 저는 사람들한테 광장 이후에 대해 얘기하고, 지금의 광장을 넘어서 현장으로 왔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계속 했었어요.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특히 넘어올 때 느끼는 해방감과 시너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거죠. 그런데 남태령을 지켜보면서 그게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게 돼서 감동적이었어요."
- 다양한 현장에 연대하는 과정에서 소위 '말벌 시민'들과도 함께하는 경험이 더 늘어나고 있을 것 같아요. 활동가 고태은은 말벌 시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궁금해요.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차별받으면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광장은 운동의 공간을 만나게 해주는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믿는 가치를 바깥으로 외치면서 바꿔나가는 경험을 함께 해나간다는 게 얼마나 해방감을 주는지 저는 잘 알거든요. 말벌 동지들도 그랬으면 했어요. 남태령 이후에 있었던 행사에서 '투쟁 현장에 가서 만나는 이들은 당신들이 어려움을 겪었을 때 가장 잘 싸워주고 방법을 같이 찾아줄 사람들이다'라는 얘기를 했었던 게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저는 새로운 연대자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함께하자고 현장의 동지들에게도 말했던 거고요. 그렇게 해서 평등수칙 등 다양한 것들이 새롭게 마련됐죠."
- 실제로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거통고) 조선하청지회가 열었던 한화오션 투쟁 문화제에서 성중립 숙소의 중요성을 호소하셨던 것도 태은님이었잖아요. (관련 기사) 그게 트위터에서 꽤 화제가 됐었죠.
"거제에서 싸우고 있는 거통고 동지들이 남태령의 말벌 동지들을 초대하고 싶어 했어요. 당시 트위터로 홍보를 해서 그곳에 왔던 분들 중에 퀴어가 많아 보이는 거예요. 처음에는 노숙할 생각을 했는데 그날 한파가 너무 심해서 숙소 고민을 하게 된 거였는데요, 숙소도 마침 3개니 각각 여성과 남성이 쓰고, 나머지 하나를 성중립 숙소로 마련하라고 말했죠. 거통고지회의 이김춘택 동지가 굉장히 감수성이 좋은 분이라, 깊게 고민할 거 없이 그렇게 결정이 바로 됐죠."
-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현장이나 의제가 있으신가요?
“저는 이제 새로운 현장을 소개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해요. 말벌 동지들이 이미 투쟁 현장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계시기도 하고요, 한 번이라도 광장에 발걸음했던 분들이라면 각자가 마음과 몸이 가는 현장들이 있을 거예요. 모든 현장에 똑같은 정도로 연대하고 마음을 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가능한 현장부터 관심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번 탄핵 광장은 다들 120%의 에너지로 힘을 내면서 견뎠는데, 그렇게 해서는 지속 가능하게 운동을 하기는 어려우니까요.”
- 새 정부 들어서서 대통령의 노동 행보가 화제가 되고 있잖아요. 이재명 정부와 노동운동이 관계 맺는 방식은 어때야 할까요?
"정치적으로 보이는 대통령의 행보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계급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노조법 2,3조 개정운동도 결국 개정은 되겠지만 너무 아쉬운 점이 많거든요. 그 법을 가지고 현장에서 어떻게 싸워 나가야 할지도 고민이 많고요. 물론, 지금 600일 가까이 고공에 박정혜 동지가 있고, 고진수 동지도 폭염에 고생하고 있는 이 시점에 이런 문제들을 최대한 빨리 해결하는 건 너무 필요하죠. 이런 곳에는 조금의 변화도 아쉬운 게 사실이지만, 타협적인 운동을 계속 고민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힘이 없으면 투쟁을 해도 타협이 되고 대화를 해도 타협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최저임금위원회만 봐도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합의한다고는 하지만 실제 노동자들이 원하는 만큼 오르진 않잖아요.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가서 대화를 하면 타협밖에 안 되는 거예요. 결국, 현장 단위에서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게 뭔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상황이고요."
- 마지막 질문입니다. 연구활동가 고태은이 지금 주목하고 있는 연대의 현장을 소개해주세요.
"크게 세 가지 현장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제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쿠팡 대책위, 이주노동자 차별철폐네트워크, A학교 공대위 이렇게 셋이요. 쿠팡은 기술적으로 노동자들을 많이 통제하고 있는 어려움이 있지만, 물류센터의 현장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투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데 많은 관심이 필요해요. 이주노동자들 역시 어떻게 민주노조운동 안에서 그들을 조직해내고 함께 투쟁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A학교 공대위는 학내 성폭력 사안을 제보 받고 함께 대응하던 지혜복 교사가 부당전보되고 해직까지 된 사안이에요. 공대위는 규모가 작지만 많은 이들과 연대하면서 원칙적인 투쟁을 하고 있어요. 학교폭력과 성폭력을 당하고 부당함을 겪은 수많은 이들과 함께 옳은 길을 가는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 가지 모두 저에겐 중요한 문제여서, 제 고민을 계속 녹여가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