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아한 가난뱅이 Jul 21. 2019

오늘도 무사히...


오래전 택시 앞 유리 어딘가에, 버스 앞쪽 어딘가에 붙어 있던 기도하는 여자 아이 그림을 기억하고 있다.

"오늘도 무사히..."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
그래서 지루하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일상이
"오늘도 무사히..."라는 간절한 기도 아래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건 그 일상이 깨지고서야 안다.

얼마 전 아파트에서 외벽 고압 세척을 했다.
외벽에 도색을 하기 전에 청소를 한다고 했다.

그는 수영을 하러 가면서 베란다 창문을 닫고 갔고,
그 날따라 수영 이후에 볼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집에 왔다. 레이가 혼자 있었던 시간은 3시간 정도.

그가 없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레이가 숨어서 꼼짝을 안 했다.
나오지도 않고, 물그릇을 넣어줘도 먹지도 않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꼼짝을 안 했다.





억지로 빼내는 것도 안 좋을 것 같아서 일단 그냥 두었다.
나중에는 침도 흘려서 그가 레이를 꺼내 잠자는 방에 넣고 문을 닫아줬다.

아마도 줄을 타고 아저씨들이 아파트 꼭대기에서 내려왔을 테고 강한 물줄기를 이용해서 외벽을 닦았을 것이다.
소리가 크게 오래 났을 거다.



내가 퇴근하고 가니 레이가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간신히 마중을 하며 베란다 쪽만 바라봤다. 또 무서운 뭔가가 나타나는 걸 경계하듯이...
한 시간쯤 후 물을 조금 먹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듯 거실의 커다란 책상 쪽으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데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늘 베란다 의자에서 밖을 보고 구경하다가 잠들기도 했었는데...






며칠이 지나서야 다시 베란다에 나가 밖을 구경했다.


아마도 조만간에 외벽 도색을 할 텐데 그때도 걱정이다.
방학 때 하면 좋겠다.
같이 있을 수 있게.


고양이는 겁이 많고, 예민한 동물이다.
깨끗한 물과, 깨끗한 화장실을 좋아한다.  
길에서 살기엔 힘든 동물이다.


레이가 길에 있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매번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오늘 밤 세상의 모든 고양이가 무사하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고양이가 내 품에 안겼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