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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쪽지 May 13. 2020

왜 하필 나야?

안 좋은 일들은 내게만 일어나는 이유

"근데 그게 왜 하필 나한테 일어나냐고."


차갑게 서린 말에 가시가 서있다. 축축하게 젖은 말투는 삼켜지기보다 뱉어질 때가 많다. 그날도 여전히 나는 내가 살아가는 삶을 꾸역꾸역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항상 불행한 일은 내 꽁무니만 졸졸 따라왔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좋은 방향으로 다듬어보려 해도 늘 최악의 상황은 더 최악으로 몰고 갈 뿐이었다. 마치 삶이 나와는 반대 축으로 흐르는 것 마냥 늘 그랬다.


동생은 나와 같이 다니면 그 불행이 자신에게도 옮는다고 했다. 멀쩡하게 잘 찾던 길도 나와 같이 가면 엉뚱한 길로 가고 있고, 버스를 타면 내려야 할 곳 보다 한정거장을 더 내려서 내린다거나 놓칠 때가 많다고 했다. 정말 먹고 싶었던 음료를 사러 함께 먼 거리에서  사 오다 바닥에 내용물을 전부 쏟지를 않나, 여행을 가서 근처에 들린 맛집은 늘 휴무였다. 이 모든 게 '우연'이라는 말로 엮기엔 빈도가 잦았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나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단순한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제발 나만 아니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일은 모두 걸렸다. 발표를 할 때도 꼭 모르는 것만 질문하고, 누가 검사하지 않아도 매일 꾸준히 해가던 과제도 내가 안 했을 때는 꼭 검사를 하고 , 삶도 또한 그랬다. 내가 잘 살기를 누군가 막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힘들 때가 많았다.



국가고시를 몇 달 앞둔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은 다 광주로 취업을 생각해 면접도 근처에 보러 가고 면접 준비도 한창일 무렵이었다. 나는 애초에 대구로 취업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자기소개서도, 면접도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 날 오후에 단톡 방에 0구 xx치과에 치과위생사를 추가모집을 한다고 공지가 왔다. 그전까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헤어지고 한 달쯤 된 나는 거의 폐인이었고 , 하필 그 0구에는 전 남자 친구가 살고 있었고,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전 남자 친구와 연락이 닿았고, 나는 그 치과에 일을 하게 되면 5분 거리에서 매일 같이 볼 수 있을 거란 단 하나의 희망을 안고 지원을 했다.


자기소개서도, 서류도 없었던 나는 내일이 현장접수 마감이라는 말에 그 날 새벽 다섯 시까지 자기소개서를 쓰고, 1교시 수업 전에 학교 복사집에 가서 복사를 하고 들어와 오타를 수정했다. 여러 번 수정했던 오타였으나 프린트로 다시 확인한 자기소개서에는 한두 개의 오탈자가 더 있었다. 그렇게 서너 번을 왔다 갔다 했고 선선한 바람이 불던 아침이었으나, 내 목에는 땀이 흥건했다. 학교 기숙사에서 20분 정도 걸어가 가족관계 증명서와 재학증명서를 뽑고 1교시 수업을 갔다. 하루 이십사 시간이 모자란 날이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는 버스로 한 시간 반이 걸리고, 택시로는 십 분이 걸리는 (택시비는 정확히 육천백 원이 들었다.) 거리에 택시를 타고 갔다. 어차피 면접은 추후의 일이었으니 나는 당장의 서류만 제출하면 되는 거였다. 이 모든 게 사랑이라 가능했다면, 그는 내 말을 믿어줄까.


병원에 도착해 서류를 제출하니 스무 개 정도 되는 질문지를 건네며 문항에 답을 하라고 했다. 뭐 금방 쓰겠지 하며 적다 보니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 반, 거의 두 시간가량 1층 병원 로비에서 허리를 굽혀가며 질문지에 대한 답을 썼다. 완성된 질문지를 차곡차곡 모아 데스크에 제출을 했더니


"6시에 면접 가능하죠?"


라는 대답이 왔다.


'아, 이게 아닌데.'


나는 면접 준비는커녕, 서류를 제출하고 바로 본가로 내려가기 위해 편하게 백팩에 반팔티, 청바지를 입었다. 떠오르는 생각들은 많았으나 머리가 꼬였다. 택시로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기에는 택시비가 너무 비쌌고,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지금 시각이 4시 30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고 나는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근처에 사는 동기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구두나 정장을 빌릴 수 없겠느냐 물었다. 언니는 지금 밖이라 안된다는 말이 귓바퀴에 맴돌았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이 순간은 최악이니까. 진심으로 바라는 것들은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더니 내가 그 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류를 내지 않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새벽에 밤새고 다음날까지 이 고생하지 않았지.'


후회로 가득 찬 머릿속은 내 뇌에 회로를 정지시켜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날은 이 서류를 제출하고 전 남자 친구와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4시까지 만나자는 말에 그는 이미 이 곳으로 오고 있었고 한 달 만에 재회가 꽤나 우스꽝스럽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남들은 내게 말한다.

"넌 참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누구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그리고 노력.

살면서 이 말들을 많이 들었다.

남들이 안타까워할 만큼 노력한 것만큼 크게 운이 따라주지도 않았고

한 번도 쉽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때는 그 순간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게 어떤 상황으로 변하든, 어떤 결과를 낳든 그건 이후의 내가 걱정할 문제이지 그때의 최선은 나의 방식임이 틀림없었으니까.


"네가 선택해 놓고 왜 네가 힘들어해."

사실 머리가 아프고 복잡할 땐, 이런 말들이 가장 가시 돋친 듯 꽂힌다.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국가고시를 준비하며 굳이 고른 병원은 학교에서도 가지 말라고 할 정도로 수직관계가 명확하고, 연봉도 적고, 일하기도 힘든 병원이었다. 조교선생님은 그래도 굳이 원한다면 가라고 했다.



남들은 어떻게 쉽게 다들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늘 걷다가 돌부리에서 멈춰 서야만 했다.

어떤 한 상황에 더한 걱정을 쏟아야 했고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하는데 써야 했다.


동생은 '가는 날이 장날' 도 꼭 언니를 보고 만들어낸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도 서슴지 않았다.  

남들이 내게 한 번 하는 소리는 귀 뒤로 넘길 수 있지만 여러 번을 반복해서 듣게 되면 내가 꼭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원했던 병원에 합격을 했지만 결국 그 병원을 가지 않았고, 구했던 자취방을 하루 전에 해지해야 했고, 복비로 135000원을 버렸고, 광주가 아닌 대구로 취업을 했고,


결국은 그 남자 친구와 일 년 뒤 다시 헤어졌다.


누가 보면 모든 걸 잃었다 생각할 수도 있다.

'헛짓거리 했네.'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기회일지 모른다고 잡은 게 모두 기회가 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았던 거다.


힘들었던 순간이 이후에 '이제야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더 이상 그 고민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뒤에 서서 보는 내 모습은 안쓰럽지만 때론 자랑스럽다. 돌아봐도 꽤나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참 많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들이 생기지.'생각했던 것들은

'그 순간에 어떻게 버텨냈지?' 싶을 정도로 또 한 번 잘 이겨냈으니까.



내 인생은 다이나믹하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렇고, 내 주변 사람들이 말하기도 그렇다.

남들은 쉽게 살아가는 세상이 나는 단 한 번도 쉽게 넘어간 적이 없다.

그렇지만 나 또한 남들의 일부분만 봐서 그렇다.


사실 모든 인생은 다이나믹하다.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고, 힘들었던 순간이 없는 사람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또 성장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무디고 더디고 느린 내가 더 성장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모든 시행착오들이 내겐 큰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라 확신할 수 있다.


모든 어려움이 추억이라 여겨질 때까지 나는

다만 느려도 좋다.


다시 한 번 울지언정

나는 조금 아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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