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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쪽지 May 21. 2020

2020년은 마냥 좋을 줄 알았다.

부제: 불편한 2020 /새로운 해는 늘 설레지만, 그 해는 늘 똑같다

I 2020년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한 해를 시작하기도 하고, 작년에는 못다 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소원을 빌기도 하고, 교회에 가 기도를 하기도 한다. 새해에는 뭔가 조금 더 달라진 내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착각. 특히나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바뀌거나 2019년이 2020년으로 바뀌는 날에는 뭔가 더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왠지 모르게 벅차고 설렌다. 하지만 모든 계획은 한두 달이 지나고 나면 다시 돌아가고 만다. 아니, 한두 달이면 꽤 오래간 편이다. 하루 이틀 안에도 사람은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하니까. 숫자가 한해 더 반올림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다. 떡국을 먹고, 새배를 하고, 잊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안부인사를 보내고. 그 인사들이 어색해지지 않는 날. 나는 또 그렇게 2020년 새해를 보냈다. 별다른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바뀐 숫자에 그저 조금 더 설레었고 전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I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2019년.


2019년은 소처럼 일만 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고 그렇게 일 년간을 죽어라 일만 했다. 남들은 '나는 매해 일만 하는 걸?'이라고 비아냥 거릴 수도 있겠지만, 첫 사회생활이었고 그 생활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 적응을 하고 마음을 잡는 데에도 일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학과 공부를 하고, 교내 동아리 활동을 하고, 8주간 대상자 실습을 할 때도, 방학 내내 꽉꽉 채워진 실습일 수를 채울 때에도 힘든 줄 모르고 살았다. 적성에 맞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맞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새로운 일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계획하고, 특이한 아이디어를 내어 내 생각을 주저 않고 말하는 내 성격에는 같은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틀에 박혀 살아야 하는 이 직업이 맞지 않았다. 숨이 막힐 때도 많았고 참아야 할 때도 많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많이 대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문적인 지식을 전해줄 때, 그들이 내게 "고마워요 선생님."이라는 말을 건넬 때면 그 고된 하루가 참 의미 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매일 기도했다. "제발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그저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힘들었다. 나는 매일 그렇게 불편한 곳에서 불편한 사람으로 살았다.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불편한 표정을 지은 나를 불편한 사람으로 생각했겠지. 매일 불편한 곳에서 불편한 사람이 되어 불편한 사람으로 살아갔다. 그 누구도 그때의 내 심정을 가늠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게 지금의 나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통의 연속이었고 '버틴다'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 일 년을 되돌아보며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매일 같은 일상을 살아가며 특별한 일 없이 그렇게 첫 사회생활 일 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2020년 2월, 나는 힘들었던 그곳을 나왔고

그래서였을까. 내가 기대하는 2020년은 유독 그랬다. 설렜다.



I 나는 십 년 전부터 2020년을 기다려왔다.


2000년도 초등학교 미술시간에는 2020년과 2050년을 그려보라고 했다. 까마득한 미래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라고 했다. 지금 그런 걸 그려보라고 한다면 흰 도화지에 검은색을 잔뜩 칠해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해버렸을 텐데 그땐 그 '미래'라는 공간이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로봇과 도라에몽의 '어디로든 문'처럼 순간이동이 가능한 문을 그렸다. 제 아무리 막연한 미래를 그려도 그걸 보고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모두가 귀에 꽂고 다니는 무선 이어폰이 그림에도 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모든 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변한 건 숫자뿐이었다. 결국은 같은 해였을뿐.



I 2020년은 마냥 좋을 줄 알았다.


마치 2020년을 살기 위해 살아온 사람처럼, 올해는 분명 행복할 줄 알았다. 하고 싶은 일은 마음껏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은 마음껏 만나며, 한 해를 돌아보았을 때 "올해가 가장 좋았어."라는 말을 내뱉길 바랐다. 퇴사 이후, 나는 나름 열심히 살았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손을 놓았던 책도 읽고, 그렇게 좋아하던 서점도 매주 가고, 쓰고 싶은 글도 마음껏 썼다. 그리고 정말 가고 싶었던 여행도 가고, 운동도 하고, 우쿨렐레도 배우고, 요가도 해야지 했는데. 일 년간 힘들게 모은 돈으로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여행이었다. 전재산을 털어서라도 유럽 일주를 가고 싶었다.


퇴사 후 첫 여행지는 제주도였는데 친구와 계획을 세우고, 표를 끊고, 숙소를 끊으려던 당일날

제주도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한 명 생긴 거다. 대구에 며칠 머물렀던 군인이 확진 판정을 받자 '이건 아니다'싶어 예매했던 표를 다 환불했다. 그 당시는 확진자가 크게 늘고 있지 않았던 터라 항공료의 환불 수수료를 모조리 계산해야만 했다. 눈물을 머금고 취소 버튼을 눌렀다.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대구에 확진자가 늘기 시작했고 나는 집 앞이 아니면 어디도 나가지 않았다.  


해야지, 해야지 하는 것들이 자꾸만 는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 시국도 끝날 거야, 끝날 거야 하는 것들이 끝이 없다. 시간은 많은데 할 수 없다고 하니까 하고 싶은 것들만 늘어나는 거다.


나는 조금씩 더 불안해진다. 예상으로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7월에는 이직을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아무것도 못해보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생겼다. 집에만 있다 보면 매일 같은 생활이 무료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이 생활이 좋지만 이 생활이 좋지 않다. 이제는 집 앞에 있는 도서관도 문을 닫고 대출신청을 해서 빌려가야만 책을 볼 수 있다고 했고, 자주 가던 서점도 이전만큼 자주 가지 못했다. 삶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다. 매일 하루를 흘려보낼수록 그 불안은 더욱 커지는 것만 같다.


그렇다. 2020년은 우리 모두에게 꼼짝없이 불행한 해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보통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해이기도 했다. 이렇게 답답하고 힘든 순간이 또 있을까. 마스크를 벗고 살아가는 삶, 서로의 간격에 의식하지 않던 삶, 이유 없이 예민해지지 않던 삶. 그저 보통의 날들이었는데.


올해의 절반이 지나간다. 총체적 난국의 대한민국. 그러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 전쟁이 언제쯤 끝날지 모르고 나는 언제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지 모른다. 어쩌면 코로나가 내 상황과도 어렴풋이 닮은 듯하다. 이 전쟁이 끝나면 나는 다시 제자리를 찾을 거고, 우리는 모두 보통인 나날을 살아가겠지.


행복, 그 누구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단어에는 딱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그것을 흘려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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