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칼로 나무를 베어낸다. 이동작을 몇 번 반복한다. 마침내 시커먼 속내를 드러낸다. 그러면 이번엔 그 시커먼 녀석을 길들일 차례다. 예쁘게 잘 다듬어야 사용할 때 편리하다. 사실 연필을 깎을 때 흑심만 잘 다듬는다면 겉을 싸고 있는 나무는 대충 베어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적당한 길이로만 베어내면 그만인 것이다. 헌데 오래전부터 예쁘게 연필깎는 것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바쁠땐 연필깎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여유를 즐기며 손으로 정성스럽게 깎아나가는 그 시간을 즐긴다. 정성을 들이다보니 연필깎는데도 집중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한 일이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숙련되어 생각보다 빨리 그 일을 마칠 수 있지만 말이다.
내가 연필을 제일 많이 깎은 것은 고등학교 미술 입시 학원을 다닐때이다. 뎃생을 준비해야하다보니 자연히 연필 사용이 많아졌고 연필깎는 횟수도 어마어마했다. 하루에 적어도 4~5번은 깎는다 하면 고등학교 3년동안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학원엘 갔으니 말이다. 허나 그때의 연필깎기와 지금의 연필깎기는 사뭇 다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작은 글씨를 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보니 지금처럼 예쁘게 다듬어 쓸 필요기 없기 때문이다. 흑심이 부러지지 않을 정도만 나무를 베어내면 그만이었다. 덧붙여 그림그리는 시간이 중요했으므로 빨리 깎는 것이 우선되었기에 구지 모양을 따질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난 그때도 예쁘게 다듬으려고 금쪽같은 시간을 투자하여 나름 애썼던 것 같다. 여기엔 연필을 깎으면서 주어지는 잠깐의 여유가 너무 달콤하여 그것을 좀 더 연장하고픈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학에 들어가고 자연스럽게 연필과 멀어졌고 그 자리는 볼펜이나 샤프가 대신했다. 나는 오래도록 그들과 함게 생활했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역시 연필을 잡은 느낌이 친정엄마처럼 편안하다.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워드로 글쓰는 것이 당연해지고 나도 컴퓨터로 글쓰기를 많이 하고 있지만 연필을 잡고서 글쓸때의 묘미를 따라갈 순 없어보인다. 노트에 글을 쓴다는 것은 만질 수 있는 글쓰기이다. 물론 워드문서도 출력을 해서 손에 쥘 순 있으나 대부분 하드에 저장해놓기만 하다보니 가시적으로 와 닿지 않는 것이다. 쓰면서 바로 출력까지 해버리는게 손으로 글쓰기의 묘미 아니겠는가.
따박따박 연필이 주는 소리를 들으며 한글자씩 적을 때마다 내 사유가 깊어지는 듯하다. 내 사유의 속도와 연필쓰기의 속도가 가장 잘 맞다. 하여 멈춤없이 글쓰기를 할때는 연필로 쓰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