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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호 Jun 21. 2023

[마음 4] 인생 노잼 시기의 깨달음

원해선 안 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침대에서 웅크리고 유튜브 영상 한두 개를 돌려보다 일어나 아침을 먹는다. 전날 해둔 빨래를 걷고 간단한 반찬을 조리한 뒤엔 운동을 한다. 땀 흘리다 보면 어느새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밥을 해 먹고 졸음을 쫓기 위한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마시곤 한 주를 나기 위한 장을 보러 간다. 냉장고를 채운 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목적 없는 핸드폰 서핑을 이어간다. 활짝 열어둔 창밖에선 구기 운동을 하는 사내들의 환성과 구호가 폭죽처럼 터져 오르다 사그라들고, 간헐적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평온해 보이는 주말 오후, 나는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인생이 정말 재미가 없다.     




이른바 인생 노잼 시기. 어떠한 의욕도 열정도 재미도 생기지 않는 시기다. 세상 모든 것들이 권태롭고 짜증스럽게 느껴진다. 흔히들 말하는 직장인 369의 법칙처럼, 3개월에 한 번꼴로 나는 세상 모든 일에 비관적인 사람이 된다. 그저 살기 위한 행동만을 완수하는 데 급급한 하루가 이어진다. 그럴 땐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글마저 멀리하게 된다. 어느 작가는 글이 써지지 않을 땐 글이 써지지 않는 기분을 글로 적었다고 하는데, 이럴 땐 글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삶이 바쁘면 재미를 돌아볼 여유 따윈 없다고 하지만, 어째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도 내겐 그런 생각이 찾아온다. 정신없이 전화를 돌리면서, 상사 앞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기계처럼 기사를 쳐내면서도 속으론 ‘아, 정말 짜증 난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해’ 하는 냉소를 뇌까린다. 그럴 땐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성서의 경구처럼 받들며 그저 버티는 수밖에. 언제 구원받을지 모르면서도 믿음을 견지하는 건 꽤나 가학적인 일이지만.


그날도 나는 재미없는 인생을 한탄하며 생존을 위한 아침을 꾸역꾸역 넘기고 있었다. 틀어둔 텔레비전에선 인지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가 출연해 패널들과 퀴즈를 풀고 있었다. 그는 ‘사람은 언제 우울감을 느끼는가?’를 논하고 있었다. 그전까지 나는 당연히 삶에 부침이나 고난이 찾아올 때 쉬이 우울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자살을 한 사람의 행적엔 별달리 나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을까?


중요한 건 그에겐 좋은 일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인생 노잼 시기의 비밀이 거기에 있었다.    


이어서 그가 전한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좋아하는 것이 없을 때 사람은 우울해진다.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은 남이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상태, 다시 말해 외부 요인에 의해 추동된 상태라면, 좋아하는 것은 나에게서 오롯이 비롯한 상태다.


그 말을 듣고서 종일 고민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곱씹다 보니 그의 이야기를 나만의 새로운 개념으로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유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원한다’의 개념은 ‘좋아한다’의 개념보다 포괄적이다. 좋아하는 것은 원하는 것이 되지만,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좋아하는 대상은 아니다.
2. 원하는 마음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엔 한계가 없다.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충족되지 않는 상태가 좋아하는 마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식물, 강아지와 고양이, 테일러 스위프트, 밀크티와 민트초코, 책을 읽다 아무 걱정 없이 청해 보는 선잠, 홈짐 등등. 1분이 채 되지 않는 새에 짧지 않은 명단이 주르륵 이어졌다.      


나는 좋아하는 게 많다. 김경일 교수의 말에 따르면 나는 꽤 행복한 상태여야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것들 중 내가 누릴 수 있는 건 거의 없구나.'


식물과 반려 동물을 기르기에 내 원룸은 너무 좁고, 선망하는 아티스트는 2012년 이후로 내한을 하지 않고 있으며, 밀크티와 아이스크림은 설탕 섭취량을 줄이려는 내게 극악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청하는 선잠 같은 건 주말에나 가능한데, 그걸 해버리면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다음날 일과를 완전히 망쳐버린다. 좋아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인지 허망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이토록 우울한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은 원해선 안 되는 것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인 듯했다. 애초에 탐할 수 없는 것을 눈독 들였으므로 내가 행복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일까. 내가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건가. 얼핏 그렇게도 느껴졌다. 처지에 맞는 것을 좋아하고 원하는 사람이 어쩌면 현명한 어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잇다 보면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해서 ‘하지만’이라는 말이 재채기처럼 튀어나왔다. 마치 몸에 나쁜 것을 반사적으로 뱉어내려는 듯이. 하지만, 행복이라는 게 어떻게 욕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는 권리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것인데. 그렇지 않다. 나는 행복할 자격이 있다. 생각을 달리해 보기로 했다.     


내가 사는 집은 반려 식물과 동물을 기를 만한 환경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식집사들의 책을 읽거나 숲 내음이 나는 룸스프레이를 쓰는 것으로 대리만족할 수 있으며,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고양이들은 예상치 못한 엔도르핀이 되어준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공연을 두 눈으로 직접 즐길 순 없지만, 그의 노래는 음악 앱으로 질리도록 들을 수 있고, 심지어 그는 엄청난 워커홀릭으로 1년에 세 개의 스튜디오 앨범도 낸다. 요즘엔 제로 열풍에 힘입어 제로 밀크티까지 나와 있다. 값이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못 사 먹을 정돈 아니다. 제로 민트초코가 나오는 것도 조만간이지 싶다. 책을 읽다 청하는 선잠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다. 30분 정도 시간을 맞춰두고 자면 밤의 수면에 큰 무리가 없다. 홈짐은 다시 생각해 보니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원하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홈짐이 있다면 운동할 맛이 더 날 것 같긴 하지만, 운동 자체는 좋아하는 마음 반 필요에서 하는 마음 반이니까. 게다가 홈짐은 어느 정도의 수준만 갖추면 더 투자할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것들은 너무 탐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선회해야지.      

 

인생이 재미없고 행복하지 않은 건 온전히 나의 책임이 아니지만,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내게 있다.


시야를 달리하고 보니 내겐 행복해질 방법이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원할 수 없는 것들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었다. 단지 그것을 탐색하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을 뿐.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은 삼십 평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나 몇 십만 원짜리 파워랙이 아니었다. ‘끈질기게 나에 대해 골몰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내기 위한 ‘결심’이었다.       


3개월에 한 번 찾아오는 지독한 우울함. 그건 어쩌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돌이켜보라고 말해주는 어떤 힘의 고마운 목소리인 것 같다. 정신없는 세상에서 삶의 중요한 것들은 쉬이 잊고 살기 마련이니까. 한편으로 그 말은 따끔한 회초리 같기도 하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아 인생 노잼 시기가 찾아왔으니, 더 늦기 전에 대처를 하라는. 인생이 재미없고 행복하지 않은 건 온전히 나의 책임이 아니지만,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내게 있다.


창밖을 보니 외출하기에 썩 좋은 날씨 같아 보인다. 테일러 스위프트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잠시 외출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가서 밀크티나 민트초코를 사 먹어도 좋겠다. 돌아오는 길엔 집앞 공원에서 고양이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계심이 강한 녀석이지만 멀리서 보기만 하면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좋아하게 될까.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많이 행복해지게 될까. 재미없던 하루의 풍경이 사뭇 다르게 보인다.


- 2023.05






마음 생태보고서



수심: ●○○○○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난 종종 떠올렸어.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생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179p




인생 노잼시기의 한 줄기 빛, 덕질 플레이리스트 (feat. 테일러 스위프트)

1. All too well (10 Minute Ver.)

2. Enchanted

3. The Way I Loved You

4. Getaway Car

5. Out Of The W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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