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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seinate Jul 31. 2017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 <라쇼몽>

[리뷰] 구로사와 아키라의 명작 <라쇼몽>

*영화 <라쇼몽> 스포일러 있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말을 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에겐 단순한 일이라도, 배경의 일을 아는 사람에겐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사실 관계가 사람마다 다르게 보일 수 있는데, 사람마다 가지는 이해관계 때문에 자신이 아는 바를 제대로 말하지도 못한다. 결국 각자의 사람들이 바라본 사실은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철저히 변하게 된다. 제3자가 진실에 접근하는 일은 쉽지도 않고, 접근한 것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사실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을 보여주는 영화다. 일본의 대문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과 <라쇼몽>의 이야기를 합쳐서 만들었다. 일본 영화의 거장 감독이 만든 작품답게 흑백 영화임에도 몰입력이 있는 영화다. 

엇갈리는 진실에 관하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라쇼몽(나생문)앞에 나무꾼과 스님이 서 있다. 여기에 하인이 다가오자, 나무꾼과 스님은 자신이 본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나무꾼은 사무라이의 시체를, 스님은 길을 걷는 사무라이와 그 아내를 보았다고 증언한다.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여겨지는 도적은 이미 쓰러져서 관청에 잡힌 상태였다. 그는 사무라이의 아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탐하고 싶었으며, 사무라이와 정정당당한 대결을 통해 그를 죽이고 여자를 얻으려 했다고 답한다. 

그러나 숨어 있다가 관청에 온 사무라이의 아내는 자신이 실신했었다고 증언한다. 자신을 모욕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무라이를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무당을 통해 강림한 사무라이의 영혼은 아내가 도적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부탁했고, 도적이 이를 거절한 다음 사무라이를 풀어주었다고 답한다. 이후 아내의 단도로 자결했다는 것이다.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사건의 진실은 점점 더 애매모호하게 변한다. 대체 사무라이를 누가 죽인 것인지도 말이 맞지 않는 데다가, 도적과 사무라이 사이에 있었던 아내의 행동 역시 진위가 불분명하다. 도적은 자신이 강하고 멋있는 사람이며 사무라이와 남자다운 싸움을 벌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무라이는 아내가 추악한 인간이며 자신은 죄가 없었음을 강변한다. 사무라이는 아내가 도적에게 남편을 죽여달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이는 아내의 입장에선 서술되지 않는다.

대화 도중 나무꾼은 자신이 사실 시신을 본 것이 아니라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했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도적은 사무라이를 묶고 여자에게 구애했다. 사무라이는 자신에게는 이런 여자는 필요없다고 말하고,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남자들끼리 결판을 낼 것을 요구했다. 이는 실신했다는 여자의 말과는 상반된다. 

도적과 사무라이는 검을 들고 엉성한 싸움을 벌이는데, 기이하게도 사무라이와 도적 모두 칼로 싸우는 것이 어색했다. 도적은 사무라이와 멋있게 싸웠다고 하지만 막상 칼이 맞닿자 서로 도망가려 할 정도로 형편없는 싸움이었다. 당당하게 검을 들고 싸우기 보다는 거의 기어가면서 공격을 피하다가 도적에 의해 사무라이가 죽은 것이다. 

그러나 하인은 나무꾼을 비판한다. 나무꾼의 이야기에도 숨겨진 비밀은 있었다. 도적과 사무라이가 싸웠고, 사무라이의 검을 도적이 챙겼다. 하지만 여자의 단도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이 몰래 훔쳐간 것이다. 직접적인 사건의 바깥에 있는 나무꾼의 이야기였지만, 그도 사실 이해관계가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무꾼의 이야기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무꾼이 증언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도가 대체 어디에 박혀있던 것인지, 아니면 떨어진 것을 주웠는지 확실하지 않다. 단도의 위치와 나무꾼의 증언에 따라 새로운 사실이 포착될 수도 있다. 단도가 사무라이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면 도적이 사무라이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단도를 가져간 것이 나무꾼이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사건의 진실은 애당초 전부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이야기는 스님에게 돌아온다. 이 영화의 등장 인물들은 자신의 해석만을 주장한다. 진짜 주인공은 스님이다. 스님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인간의 성격에 대해 무서움을 느낀다. 이렇게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성격이라면 뭘 믿어야하는지 고뇌한다. 진실에 닿는 것도 어렵고, 진실에 대한 서술도 믿을 수 없다면 대체 사람과 사건에 대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인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인간은 원래 이런 더러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는 라쇼몽 앞에 버려진 아기의 옷을 가져가며 인간에 대한 불신과 자신의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나무꾼이 버려진 아기에게 접근하자, 스님은 나무꾼을 불신한다. 하지만 결국 스님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는다. 버려진 아기를 키우겠다는 나무꾼의 말에 다시 그를 믿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물론 이 역시 나무꾼이 주장하는 내용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스님은 파편적인 사건과 믿을 수 없는 인간들의 말 속에서도 사람을 믿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잔상과 흔적만 남은 세상이라도 인간에 대한 신뢰는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무꾼에게 고개를 숙이는 스님의 모습에서 보이는 것은 단순한 신뢰가 아닌 진실의 파편 속에서도 사람을 믿겠다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믿음이다. 스님은 거짓말이 판치는 재판의 모든 것을 듣고도 사람을 믿는다. 진실이 해석의 흔적만 남아서 떠도는 세상과,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와 선택이 가지는 의미를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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