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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미 Aug 18. 2023

생맥주 한잔 더 주세요!

Valparaiso, Chile

'안되겠다. 이 도시에 하루 더 머물러야겠다.' 기어코 결심한 것은 산티아고로 다시 돌아가는 버스의 탑승 시간이 반나절도 남지 않은 늦은 저녁 식사를 하던 와중이었다.


발파라이소를 알록달록 꾸며낸 벽화에 정신이 팔린 채 여기저기로 열심히 걸어재낀 탓에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저 높이 떠있던 해가 지평선 끝자락까지 기울고 나서야 뭣 좀 먹어야겠다 하며 들어선 식당은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여행지에 관한 정보 수집에는 꽤나 공을 들이는 편인데, 반대로 음식이라던가 맛집에 대한 정보는 뒷전으로 미루고 미루다 결국 떠나는 날까지 맛집 정보력 0%에 수렴한 채 비행기에 오르고 마는 것이다.


그 덕에 '어디로 여행 다녀왔어요.'라고 하면 '어! 그곳에 유명한 음식 있는데! 00라고 먹어 봤어요?'하고 날아오는 질문에 '그게… 뭐예요…?'라며 대답하기 부지기수였고, '이거는요? 저거는요?' 몇 번의 파생된 물음들에 도리질만 치다 결국 '대체 뭐 먹고 다니셨어요…?' 괜스레 안쓰러운 눈빛을 받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어색하게 웃으며 ‘뭘 먹긴 먹었는데….’ 머쓱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서 외관이 맘에 든다든지, 앞서 들어간 사람이 단골손님 포스를 풍긴다든지의 여러 가지 이유로 발길이 이끄는 대로 그날의 식사를 선정하곤 했다. 게다가 메뉴판을 보아도 친절히 영어로 알려주지 않는 한, 어떤 음식인지도 모른 채 주문하는 순간부터 테이블에 음식이 놓일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도 모두 내겐 여행이 주는 하나의 재미랄까.


이 식당에 발을 들인 이유도 단순했다. 배고픔을 느낄 때 즈음 멈춰 서서 둘러본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이었고, 창 너머 비치는 종업원의 바삐 움직이는 모습에 '맛집이겠거니.' 싶은 마음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일단 시원하게 목을 축일 맥주는 기본이요, 어떤 메뉴를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나려나. 생각보다 두께가 있는 메뉴판에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건너편에서 나를 예의주시하며 주문을 받으러 와도 되는지 망설이고 있는 종업원을 위해서라도 신속한 판단을 내릴 때다. 이럴 땐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코카콜라 맛있다… 맛있으면 또 먹어…'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찾아봤을 척척박사님에게 모든 선택권과 책임감을 지우며 손끝에 걸린 글자를 천천히 읽어본다. '초릴라나'. 음. 메뉴 이름도 간결하니 맘에 든다.


힘겹게(?) 주문을 마치고 나서야 주욱 한번 둘러보니, 식당에 비치된 모든 TV에서는 축구가 생중계 중이었다. 지금이 축구 시즌이던가. 자리가 먼 탓에 어느 팀끼리 맞붙는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바로 앞쪽 테이블에 도란도란 앉아있던 한 가족의 부자지간으로 보이는 남성 둘이서 가슴을 부여잡고 감탄과 절규를 내뱉고 있는 걸 보니 응원하는 팀이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음식보다 먼저 나온 맥주의 잔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흐를세라 한 모금 들이켜고 있는데, 이내 가게의 모든 이들이 절규와 함께 머리를 부여잡는 그들을 보며 '골 먹혔구나'하는 확신과 함께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물론 마음속으로….

맥주를 세 모금째 들이킬 때 즈음 산처럼 쌓인 감자튀김과 고기, 송송 썰린 페퍼로니 같은 소시지의 초릴라나가 내 앞에 놓였다. 내가 생각한 식사는 아니었지만, 맥주 안주로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좋은 마음으로 포크를 들어 전투적으로 초릴라나를 없애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른 탓인가. 맥주잔과 접시가 비어질수록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극에 치달았던 배고픔이 슬슬 해소되자 자비 없던 포크질도 점점 느려졌다. 더군다나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채 비어진 맥주잔에 흥이 깨진 탓이 컸다. 아직 접시 위 반절이나 남은 초리졸라에 맥주 한 잔만 더 하면 딱 좋겠는데. 쩝. 괜히 아쉬운 마음이 떠오른다.


아쉬움. 방금 전 들렀던 기념품 샵에서 못내 내려놓은 그림 한 장도 아쉬웠고, 아기자기한 이 도시 속 어딘가 미처 보지 못한 벽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 아쉽고. 발파라이소에 있다던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푸니쿨라(언덕을 오르는 케이블카)도 타보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아쉬움 만만인데! 지금은 맥주 한 잔에도 아쉬워하고 있지 않은가!

이쯤 되면 아쉬운 감정이 아니라 억울하기까지 하다. 지구 반대편 이곳, 남미에 오기까지 나름의 큰 결정과 결심이 필요했다. 내 생에 다시 한번 남미를 올 일이 있냐, 없냐 누군가 물어본다면 '언젠가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그 언젠가가 먼 훗날일지, 가까운 시일일지 아무도 모르는 일에 가까웠다.


'다음에 다시 오면-'이라는 가정은 지금의 내겐 사치였고, 만약 다시 올 수 있다고 한들 왜 지금의 행복을 미뤄야 하지?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확실한 건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훗날 이 여행을 추억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 즐거움, 행복, 유쾌함. 그런 것들로만 가득했으면 했다. 그래서 이 도시에 하루 더 머무는 결정으로 당장의 아쉬움을 고이 접어 날릴 수 있다면야 이 정도의 변수는 기꺼운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눈 앞에 놓여진 확실한 행복을 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 맥주 한 잔의 처방이 시급하니, 한껏 경쾌해진 마음으로 외쳤다. Una caña, por favor!(생맥주 한잔 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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