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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녕그것은 Sep 23. 2019

사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스위스치즈 /  경성치즈 - Emmental]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술이 있다. 연애의 기술, 육아의 기술, 거짓말의 기술, 독서의 기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전에는 생각지 못한 결정의 선택과 결정의 폭이 넓어지면서 점점 더 노련해지는 것들이 있지만 나에게 여전히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




 사과의 기술


네? 제얘긴가요?





 유치원 때부터 대학 4년까지 빠짐없이 정규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했고 가죽공예, 단전호흡, 첼로 레슨, 꽃꽂이. 배우는 것에 있어서는 빠지지 않는다 자부했는데 왜 아무도 나에게 사과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주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3년 내내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함께했던 친구 J가 있다. 등교부터 야자를 마치고 시작되는 학원까지 함께한 우리는 처음부터 안 맞았다. 지금보다 더 스스럼 없었던 나를 보고, 그녀는 '친하지도 않은데 손을 덥석 잡고 매점으로 끌고 가는 부담스러운 아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톡 하고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유리구슬처럼 큰 눈을 가진 J와 당시 필터 따위 없는 정의의 독불장군이었던 나는 정말 지겹도록 싸웠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나는 "아니 근데.."로 시작했고 기어코 J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흐르게 만들었다. 


 여고생들이 싸우는 것이 사실 뭐 그렇게 특별한 일이겠냐만, J가 나에게 가졌던 불만은 '왜 사과를 하지 않냐'라는 것이었다. 어떤 날은 몇 시간이고 실컷 언쟁을 펼친 뒤였는데 내 잘못인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렇지만 죽어도 '미안하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얼렁뚱땅 넘어간 적도 많았고, 한 번은 구구절절 미안하다는 편지를 써서 J가 없을 때를 틈 타 몰래 책상 위에 올려놓고 도망간 적도 있었다. 


J에게는 당시 그런 내가 참으로 못나 보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 우리는 조금 더 잘 지내게 되며 동시에 못 지내게 됐다. 이해의 폭이 조금은 넓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인내하는 시간이 조금 더 늘었던 것이었다. 그날도 대단한 일도 아닌 것으로 사소한 다툼은 시작됐고 우리는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처럼 서로를 할퀴기 위한 말들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우리는 애초에 맞지 않는 관계였다'라며 내가 가진 그녀의 흔적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 뒤로 나는 남자친구를 만나고, 이사를 가고, 이직을 하고,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후배가 생기고, 몇 번의 여행을 다녀오고. 마치 그녀가 내 인생에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일상을 살아갔다.





이 아이에게도 사과는 어려울 수 있다..(헷)





 "사과는 빨리해야 해"



 회사 회식자리에서 다른 팀 사원이 술 먹고 우리 팀에게 실수를 한 일이 있었다. 우리는 당연히 그 다음날 술이 깬 그가 사과를 하러 올 것이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2주 후에 우리에게 사과했고 그동안은 두렵고 죄송한 마음에 사과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로서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가 갈 듯했다. 그때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사과에는 기술도 요령도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되면 그때 바로 사과해야 해. 그 시간 동안 너에 대한 분노와 오해만 키울 뿐이야."


 사과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회의실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하루 종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그날 밤 J가 꿈에 나왔다. 꿈의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 뒤로도 종종 J는 헤어진 남자친구처럼 내 꿈에 등장했다.


 물론 많이 다퉜지만 우리가 친구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종종 발견됐다. 지하철을 기다리다 서울재즈 페스티벌을 알리는 와이드 칼라 광고를 봤을 때라든지, 수능이 끝나고 우리도 어른이라며 코 삐뚤어지게 취해 쓰러진 오리역 광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등. (이렇게 말하니 정말 그녀는 헤어진 전 남자친구 같다) 안 맞는 부분은 많았지만 공연 취향, 웃음 코드, 10년의 시간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우리가 있었다.



 이번 주 내내 계속되는 칼퇴로 기분이 좋았다. 이 저녁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버스를 타려고 큰길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J의 커다란 눈과 내 눈이 자석처럼 마주쳤다. 너무 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적을 깬 것은 J였다.


 "너 왜 그냥 가려고 해?!"

 "너야말로 왜 가만히 있어?!"

 "너 왜 여기 있는데?!"

 "너는 왜 여기 있는데?!"

 "난 저기서 떡볶이 사 가려고!"


놀람과 황당함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 J가 손에 든 종이 백을 건넸다.


 "뭐야?"

 "케이크야. 유통기한 좀 지난 건데 난 아까 한 조각 먹으니 괜찮았어. 먹어."


 엉뚱하고 뜬금없는 면은 여전했다. 몇 마디 더 주고받다 그녀는 돌연 이렇게 말했다.


 "너 연락해라?! 내 번호는 있냐?"

 "너 나 해! 나 집 가서 김치볶음밥 먹을 거야. 간다!"


 도망치듯 집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어찌나 정신없던지. 집에 가서도 한동안 복잡한 감정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우리는 참 질긴 인연'이라는 것.




 

오늘 점심은 그녀가 준 케이크다. 에멘탈 치즈 모양의 케이크다. 흔히 톰과 제리에 등장하는 치즈라고 알고 있는 그 치즈가 에멘탈 치즈인데, 참 공교롭다. 


에멘탈치즈는 스위스의 한 조각이라고 불리는 스위스의 대표 치즈다. 경성 치즈인 탓에 나이프로 커팅을 해 먹거나 슬라이스로 가공되어 패킹된 제품들을 샌드위치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에멘탈 치즈는 그 식감이 마치 얇은 지우개를 씹는 듯한 식감과 함께 딱히 별다른 맛을 못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온에 조금 두고 천천히 음미해보면 은은하게 풍기는 고소함이야말로 에멘탈치즈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카페 '화목한 분당 상회'



 이번에도 먼저 연락을 준 것은 J였다. 이번엔 나도 늦을 세라 '그럼 말 나온 김에 술이나 먹자'라며 약속을 잡았다. 돌아오는 토요일 우리가 학창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동네에서 보기로 했다. 


 사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잘못했으면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그게 왜?'라고 할지도 모른다.  무슨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지, 눈을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 건지, 어떤 목소리가 나올지. 기어코 J와 나는 눈물을 보이고 말지... 토요일의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이 또한 살아가며 겪는 연습들 중 하나일 테니까.


 톰과 제리의 의외의 결말처럼 우리가 다시 동화적인 친구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난 이번에 마음속 부스러기들까지 모아 사과하지 못했던 날들을 사과한다고 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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