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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움직이는섬 Sep 17. 2016

#00. 일찍 일어난 백수가 수영을 배운다.

    아침 6시 15분, 침대를 벗어나기에는 아쉬운 시간. 아침 6시 18분, 아이들은 하루를 위해 꿈속에서 힘을 모으고 있을 시간. 아침 6시 26분, 등교를 알리는 알람이 울릴까 불안한 잠을 청하는 시간. 아침 6시 35분, 어떤 직장인들은 벌써부터 출근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시간.


아침 6시 55분, 일찍 일어난 백수가 수영을 배우기 위해 낯선 해저 세계로 다이빙하는 시간.


    이 글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 백수 청년의 이야기이다. 그는 여타의 청년처럼 사상 최악의 취업난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어떤 이유였을까? 그러던 그가 난생처음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한 건. 왜 하필 백수가 수영을 배우려고 한 거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 자신도 이런 결심을 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올여름, 속초 해변에서 튜브가 뒤집어질까 전전긍긍하던 자신의 모습이 창피해서였는지, 아니면 주말마다 해맑게 수영을 다니는 4살짜리 조카가 괜스레 부러워서였는지, 정확한 이유는 그도 모른다. 유독 견디기 힘들었던 올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그를 자연스럽게 물가로 이끌었는지도. 어쨌든 그는 일주일에 세 번, 오전 7시에 수영을 배운다.


    그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고, 안쓰럽게도 철학 석사학위마저 소유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인문학, 그것도 철학 석사라니…. “나는 취업을 포기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비참한 경력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철학을 인류 지성사의 꽃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건 단지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철학은 꽃이라서 취준생에게는 관상용에 불과하니까. 아무리 배고픈 백수라도 꽃을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때론 진달래 같은 꽃으로 화전(花煎)을 만들어 먹는다고는 하지만, 화전의 주인공은 꽃이 아니라 부침 가루다. 꽃은 단지 미(美)를 위해 거들뿐!


    수영을 택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무언가 해야겠단 강렬한 충동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스멀스멀 검은 기운이 그를 엄습했고,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샘솟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을 극복할 가장 손쉽고 건설적인 활동은 단연 운동이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육체의 나른한 피로가 만들어내는 안정감, 그는 이미 이를 경험한 바 있다. 석사 논문을 쓸 당시였다. 그는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운동을 했고, 숨겨져 있던 복근은 ‘나 여기 있어!’라고 외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다. 그 뿌듯함이란! 어떤 지적 성취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논문보다 운동을 우선시했다. 이런 합리적인 현실도피라니.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고래’, 마치 움직이는 섬처럼 보이는 거대한 생명체.


그에게 고래는 어린 시절부터 지구 상의 가장 신비한 생물체였다. 분수 같은 물줄기를 뿜어대는 고래의 그림은 아동서적의 표지를 장식하곤 했고, 커다란 달이 떠 있는 밤, 하늘을 헤엄치는 고래의 그림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경우 고래의 모습은 대부분 그림자로 처리되곤 했던 것 같다. 어렴풋한 윤곽이 고래의 신비감을 더해준다는 듯이. 그래서인지 에게 고래는 어떤 신비함을 전해주는 상상력의 모태였다. 어릴 적 즐겨보던 황금 고래를 찾던 만화의 영향일지도?


    단지 상상에서만이 아니라 고래는 실제로도 신비한 생물이다. 그 압도적인 크기와 다르게 대부분의 고래는 성격이 온순하다.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지능도 뛰어나다. 수중에서 공기 방울로 놀이를 즐기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주변의 인간에게 장난을 걸어오는 녀석도 있다. 또한 커다란 입을 가졌지만, 그의 주식은 거대한 물고기가 아니라 새우 같이 아주 작은 바다 생물인 경우가 많다. 물론 먹는 양을 보면, 크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잠수능력이다. 고래는 폐호흡을 하는 지구 상의 포유류 중에 가장 오랜 시간 동안(대략 한 시간) 잠수를 할 수 있고, 향유고래의 경우 빛이 들지 않는 깊은 심해(3km)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바다의 저 깊은 곳을 탐험하는 해양학의 선구자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수영장을 배우기로 결심했을 때 고래가 떠오른 건. 아직 호흡하는 법도 제대로 모르지만, 그는 고래처럼 거친 물살을 헤엄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철학과 석사로서 구직활동을 하다 보면, 타인의 말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곤 한다. 심지어 신입이라니…. 주변인의 걱정이 끊이지 않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동정 사이에서 한심함을 표하는 눈빛을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 것 같다. ‘그러게 왜 돈 버는 데 도움도 안 되는 인문학을 전공해서 시간과 돈을 버려. 어리석기는….’ 웃프게도 돈 잘 버는 친형이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 소리를 들으면 아무리 온순한 고래라도 꼬리를 세차게 휘두르며 분노를 표할 것이다. 고래가 인문학을 전공했다면 말이다. 철학 전공자라면 인문학을 천시하는 사회를 향해 단식농성이라도 벌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화를 내려면 일단 밥 잘 먹고 건강해야 하니까 이번만큼은 넘어가 주기로 하자. 그럼에도 주위에 떠도는 말들을 웃어넘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빛도 들지 않는 심해로 잠수할 때, 고래의 주변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아마 타인의 시선도, 어떤 소리도 없는 그런 공간이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취준생이 자주 듣곤 하는 위로와 질타의 말도 없는 공간이겠지. 그럼 거기서 보이는 것, 거기서 들리는 것은 무엇일까. 또는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이건 확실한 것 같다. 비록 의지할 한 줌의 빛도 없지만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심장이 열심히 박동 치고 있다는 것. 그 박동은 자기 내부로부터 나와 고요한 심해를 울리고 있을 것이다.


    사실 고래의 상황은 그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백수인 그에게, 아니 ‘나’에게는 현실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비록 옅은 소독약 냄새가 나고, 작은 물장구 소리가 남아있는 공간이지만. 거기서는 모든 말들이 사라진다. 남는 것은 작은 소음과 심장이 뛰는 소리, 그리고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품 소리뿐이다.


    온갖 수식어를 붙였지만, 결론적으로 이건 나의 수영 일기다. 고래처럼 유려하게 헤엄치길 원하는 수영 초보의 도전기이기도 하다. 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어떤 백수의 자기소개서일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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