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라는 'wea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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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소통’만큼 대중적인 소재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익숙하기도 하다. 단지 영화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소통은 TV, 책, 영화, 때로는 미술―추상화 역시 주관적인 느낌의 소통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실험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은 물론 우리의 일상에서도 흔히 거론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소통에 관한 ‘말’이 넘쳐나고 있다. 소통의 과잉이다.
상황은 역설적이다. 과잉의 원인이 소통의 결핍과 부재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단절과 몰이해가 현대인의 일상이라는 듯이 반복적인 소통의 갈구 역시 공존한다. 우리 주변을 떠도는 소란스러운 말들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소통의 순간을 발견하길 원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도 소란의 한가운데에 있다. 소통이 영화를 이끄는 큰 줄기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말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건 역설적으로 기존의 언어를 뒤집는 것이다. 소통을 정의하는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이해를 갈구하는 많은 말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영화는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이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영화의 장르는 SF이다. 이야기의 핵심 사건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계인의 출현이다. 하지만 접근 방식이 전혀 다르다. 문제는 자신의 행성이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아니다. 영화에는 변변한 전투 장면도 없고, 외계인과의 갈등 구조 역시 없다. 전개는 단순하지만 집요하다. 이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하고 신비로운 생명체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전혀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진 지적 생명체와 어떻게 대화하고 그들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까? 즉, 타자 중의 타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드니 빌뇌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도 내 기분을 이해하지 못해!’라는 투정 어린 불만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다. 물음은 더 근본적이다. 전혀 다른 세계와, 경험과, 언어를 가진 존재에 대한 이해 가능성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 ‘언어’가 있다.
주인공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는 저명한 언어학자이다. 이안 도넬리(제레미 레너)가 루이스와의 첫 만남에서 인용했던 그녀의 논문은 언어학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에게 언어는 세계를 여는 창이다.
그러나 미지의 존재인 헵타포드(외계인)는 인간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단지 낯선 외국어를 대면한 수준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 자체를 공유하지 못한다. 그만큼 외계인의 사고는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과 인류의 목적은 명확하다. 그들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쳐주는 것, 그리고 인간과는 다른 그들의 소통 방식을 배우는 것. 그래야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지구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 과정은 마치 갓난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듯이 조심스럽고 더디다. 익숙함을 벗어나 때로는 두려움을, 때로는 경탄을 자아내는 그런 낯섦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마저 부족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는 타자와 그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욕망과 노력이 있다. 그들에 대한 판단을 ‘선점’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선 밖에서는 정반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TV에서는 외계인의 출현에 대한 자극적이고 날카로운 말이 연신 부딪힌다. 대중을 흔들고, 폭력을 종용하는 말들도 넘쳐난다. 그들에게 미지의 존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이해를 벗어난 존재는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칼과 총이, 그리고 칼이나 총과 같은 언어가 세계를 바라보는 도구이다.
대조적으로 루이스 박사에게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다. 그녀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많은 부분이 언어로부터 온다고 믿고 있다. 습득한 언어에 따라서 세계를 보는 시각이 바뀐다는 것이다. 중국이 마작을 통해 헵타포드와의 소통을 시도할 때, 주인공은 그들이 인식하게 될 세계를 우려한다. 마작은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을 내포하는 폭력의 언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연신 조심스러운 주인공의 행보는 이해할만하다. 그들의 사고에 어떤 언어가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들과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헵타포드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변할 수 있다. 폭력의 방식으로.
‘use weapon’, 오해의 씨앗이 된 표현이다. 지구에 온 목적을 묻는 인간에게 헵타포드는 말한다. ‘무기를 사용한다’고. 이미 폭력적 언어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이를 전쟁의 선포로 받아들인다. 불완전한 문장의 의미를 자신의 언어로 채우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타자를 ‘나’에게로 환원하려는 폭력적 언어를 반영하는 거울을 통해서.
반대로 루이스는 판단을 보류한다. 자신의 언어로 타자를 규정하기 전에 한 번 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인다. 그녀가 보기에 ‘weapon’은 무기가 아니라 도구일 수 있고, 장비일 수도 있으며,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그 ‘무엇’ 일 수도 있다. 이 ‘무엇’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선입견은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말의 뜻을, 말의 의도를 파악하기를 유보한다. 어쩌면 이런 태도는 소통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존재가 말하는 ‘무엇’을 이해할 수 없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러나 한계는 무(無)가 아니다. 그것은 무의미가 아니라 기존의 방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소통의 욕구가 발생한다.
결국 결말에서 주인공은 헵타포드가 말하는 ‘weapon’을 이해하게 된다. 인식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타자의 언어, 소통의 도구로서의 ‘weapon’을 말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외계인과 같은 미지의 존재에만 한정될까? 만약 그렇다면, 영화는 정말 SF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샹 장군에게 들려준 부인의 유언이 그의 마음을 돌렸듯이, ‘weapon’은 단지 외계인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는 아니다. 결국 무기는 우리 자신을 향해야 한다. 익숙함이라는 장막에 가려진 ‘너’와 ‘나’야말로 긴급한 소통이 필요한 타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이'arrival'이 아니라 'contact'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