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대구, 그 둘의 박물관
여행 매거진 BRICKS Trip
포르투갈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바칼라우(Bacalhau, 대구)와 뽈보(polvo, 문어) 요리가 아닐까 싶다. 그 중에서도 바칼라우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음식이다. 오죽하면 바칼라우를 ‘믿을 수 있는 친구fuel amigo’라고 부를 정도일까. 소금에 절인 염장 대구 요리인 바칼라우는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응용이 가능하고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 바칼라우는 포르투갈 앞바다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물고기가 아니다.
15세기 말, 포르투갈 어부들은 북대서양 심해에 사는 바칼라우를 잡기 위해 먼바다까지 조업을 하러 나갔다. 생선이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상하지 않도록 소금으로 가득 찬 염장실에 대구를 보관한 게 포르투갈식 염장 대구의 기원이다. 당시 어부들은 한 번 바다로 나가면 최소 반년 간 매일 4시에 일어나 바칼라우를 낚았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망망대해로 떠나야 했던 어부들을 기리기 위한 박물관이 어촌 일하보에 세워졌다. 바로 일하보 해양박물관(Ilhavo Maritime Museum)이다. 일하보는 바칼라우 어업으로 유명한 어촌으로, 포르투와 리스본의 중간 지점에 있다.
1970년대 지어진 일하보 해양박물관은 2000년대에 포르투갈 건축회사 ARX에 의해 새롭게 확장되었다. 대담한 디자인과 감각적인 재료로 두 배 이상 확장된 박물관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도 선정됐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3월의 어느 날, 그렇게 일하보 해양박물관으로 향했다.
일하보 해양박물관의 외관은 박물관이라기보단 복잡한 미래 도시를 보는 듯하다. 단절된 기하학적 컨테이너 세 덩어리가 연결된 구조로 되어 있는데 각각 기억의 장소, 해양 생물의 공간, 연구 센터이다.
전체 설계의 테마는 ‘물’이다. 그래서인지,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안마당에 보이는 물웅덩이가 눈에 띈다. 태양빛을 반사하는 이 물웅덩이는 그 자체로도 멋지지만, 반사된 물결이 박물관 내부의 복도에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인상적이다. 평일 오후, 고요한 박물관 복도를 각기 다른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채우기 시작했다. 바다의 물결을 닮은 대리석 바닥을 밟고 점점 좁아지는 복도를 홀로 걸어봤다. 오롯이 물과 빛에 집중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전시실로 들어갔다. 일하보 해양 박물관은 염장실을 포함한 원양 어선의 모습을 생생히 재현했다. 배의 어느 부분에 대구를 보관하고, 소금으로 염장을 하고, 어디서 잠을 자고 요리를 했는지까지 말이다. 북대서양으로 떠난 어부가 됐다고 상상하며 전시실을 걸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딴 인형이 아니라 철제 구조물로 된 형상으로 당시의 어부를 표현한 점이었다. 애매하게 닮아 어색하고 불쾌한 인상을 주는 것보다 완전한 추상으로 재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은 여러 새로운 시도로 관람객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몰입을 위해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 것일까? 일하보 해양 박물관의 가장 하이라이트이자, 내게 가장 많은 고민과 질문을 던진 곳은 수십 마리의 바칼라우가 헤엄치는 거대한 수족관이다. 동물권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로 동물원과 아쿠아리움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가지 않는다. 바다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이주하는 바칼라우에게 고작 10m 안팎의 수조는 감옥과 다름없다. 대구는 괜찮고, 벨루가 돌고래는 괜찮지 않은 걸까? 종 위계를 떠나, 살아있는 존재를 '전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역사학자 프랑크 안커르스밋은 재현을 모사와 동일시하지 말고, 좀 더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현실을 모사하려고만 하는 이는 늘 ‘더 진짜인’ 현실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내가 상상하는 미래의 박물관은,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도 상상할 수 있도록 몰입의 여지를 주는 곳이다. 모사의 강박에서 벗어나 과거를 보여줄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바칼라우가 없는 바칼라우 박물관을 상상한다. 이미 일하보 박물관은 대담한 확장과 새로운 재현을 보여줬다. 이렇게 과감한 박물관이라면, 언젠가 바칼라우 없는 바칼라우 박물관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글/사진 사과집
한때 모범생 증후군과 장녀병에 걸린 ‘공채형 인간’이었으나, 퇴사 후 1년간 동남아와 유럽을 떠도는 여행자가 되었다. 한동안 캐리어 속에 우쿨렐레를 넣고 메콩강을 여행하는 노마드로 지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머물 때는 건축에 빠졌다. 삶과 사람을 예민하게 감각해 자주 소름이 돋는 피부를 갖는 것이 꿈이다. 2019년 첫 에세이 『공채형 인간』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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